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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소식이 없어서...

잔잔한미소/사람들

by ih2oo 2021. 1. 18.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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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월 18일 월요일

 

그동안 카톡으로 소식을 주고받던 친구가 반응이 없어서 궁금하다.

왜 소식이 없을까?

 

그동안 내 글에 반응하여 용기를 주던 그였기에 더욱 궁금하다.

내 글에 관심 두어 좋은 의견도 주었는데 보내 준 글들이 날아갈까 봐

한 곳에 모았다.

 

둥지

글쎄요 유소 씨가 집 짓는 방법을 인간에게 가르친 후로 참으로 많은 다른 종류의 집을 짓고 살았지요. 땅굴 집에서 움막집으로 초가집으로 한옥 기와집으로 양옥집으로 또 아파트로 많이 변형되어 왔지요. 그중에서 구들장 보일러를 사용하는 한옥이 제일 좋은 것 같은데 요즘은 아파트가 가장 비싼 것 같아요. 서울에선 몇십억이 보통이니···.

새나 날짐승들의 둥지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거의 변동이 없는 것 같아요. 들이나 산으로 나가서 자세히 살펴보지 못해서 그런지.. 하긴.. 나무 위에 지었던 까치집이 전봇대 위에 짓는 것 보니 달라진 것 같긴 한데···.

, 산에 가면 새들이 사람을 피해서 달아나기보단 먹이 달라고 쫓아다니는 것을 보니 많이 달라졌지요. , 새들의 노랫소리도 남진의 둥지라는 노래를 부른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고.···. 세상 많이 변했어요.

 

포대화상

기단 검은 판에 개구편소(입을 열면 곧 웃음이요 ) 소고 소금(옛날에도 웃었고 지금도 웃고) 범사부지일소(모든일은 한번 웃음에 붙이고) 대담 능용 용천 용지(대담하게 받아들이고 하늘도 받아들이고 땅도 받아들이는데) 어인하소불용(사람에게 있어서 무엇인들 받아들이지 못하리오)라고 쓰여 있지요.

확대해서 보시고 인터넷에 포대화상 개구편소를 치시면 확인할 수 있지요

 

집밥

글을 읽으니 옛날 울 엄니가 생각나네요. 우리 부엌 솥에는 딴솥과 양은솥도 있었고요 도고통과 도곳대 학독도 있었고요.울 엄마는 설겅 대신 살강이라 했고요, 찬장도 나뭇청도 아궁이와 고래도 생각나네요. 싸전 국밥도 있지만 쇠전 국밥과 주막거리 국밥도 있었지요. 선지 국밥도 생각나고요, 어쨌든 옛날 생각이 가득하네요.

 

 

 

아름다운 공주대학교

공주대ㅡ정말. 내가 다닐 땐 대운동장 위 건물 한 동과 바로 언덕 위 연구실 그리고 졸업할 때쯤 지어진 체육관이 전부였지요. 점심시간에 도시락 들고 뒷산 묘 마당으로 가곤 했고요. 정원수는 하나도 없고 터를 정비하느라 블도져 소리만 요란하고 어수선했지요.. 전막에서 논밭 길을 가로질러 걸어서 학교에 갔는데 교문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가르치는 사람은 배움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라는 말이었지요.

입학 인원도 3백 명 남짓이라 거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어서 서로 인사를 나눌 수 있어서 좋았지요.

 

 

 

 

고마나루터

옛날 근방 사람들은 장날이면 뭐라도 들고 공주시장에 이 나루를 건너 쇠징이 펄(소정방이 들 )을 지나 향교골(생제골 잘못된 발음) 지나 시장에 가서 막걸리 한 되(곤 계란 안주) 내기 윷 한 판 놀고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오곤 했죠.

 

 

 

영동루

옛날엔 진남루와 공북루밖에 몰랐는데 금서루와 영동루가 많이 활용되는군요.. 진남루를 통하여 성안마을에서 배를 건너 일신 역으로 가는 길이 한양 가는 길로 알고 있었지요. 논산 쪽에서 오는 사람들은 옥룡동 쪽에서 성안마을로 갔겠지요. 고맙습니다. 못 가 본 영동루를 소개해주셔서.

 

 

 

 

금강 가 아이들

옛날 어릴 적 끝없이 펼쳐있던 은모래 벌판이 눈에 아른거립니다. 국민학교 때 방학이 되면 새나라의 어린이는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다고 어두컴컴한 새벽에 백사장에 모여 주먹 만 한 공 하나를 가지고 축구하던 시절이 눈에 선합니다. 그러다가 아침 햇살이 새벽 공기를 뚫고 나오면 내일을 기약하면서 헤어졌고 중고 시절에 데데 울(기가진ㅡ금강과 유구천이 합쳐진다고 더 더울? ) 나루를 건너기 위해서 백사장을 걸으면서 운동화에 모래가 안 들어가게 하려고 살살 걸었지요. 어느 가뭄이 심했던 해에는 나룻배를 띄우지 못하고 바지를 무릎 정도 걷어 올리고 건너기도 했고 겨울에 바람이 쌩쌩 부는 어느 날 강의 가장자리가 얼어서 배가 닿지 않아 운동화 신은 채로 펄떡펄떡 뛰어 배에 오르고 내리면 운동화 속까지 다 젖지만 학교까지 열심히 걸어가면 발에서 김이 나고 물기가 마르곤 했죠. 3 시절엔 고재원 교장 선생님의 방침에 따라 금강교 밑에서 해양훈련이라고 3일씩 수영 연습도 했고요. 대학시절엔 금강교에서 저 위쪽 국립 결핵병원을 넘어까지 흰모래가 아른거리네요.

 

 

 

기다림

그간 많이 쓰셨네요. 사람은 기다림 속에서 삶이 있고 희망을 가질 수 있고 또 기다림에 지치고 그 기다림 끝에 사실을 확인하고 실망할 수도 있겠지요.

내 생활에서 가장 생각나는 지루한 기다림은 나룻배를 기다릴 때인데 그중에서도 시험공부를 하려고 하교 후 집으로 열심히 달려가는데 강가에 이르면 배는 건너편에 있고 사공은 낮잠을 자고 있는지 주막에서 막걸리 한잔을 기울이는지 대답이 없을 때였지요.

무령왕릉에 대해서는 71년 왕릉 문을 처음 열었던 안승주 교수의 강의를 들어야 하지요. 문 열 때 흰 연기 냄새가 혼령으로 빠져나갔다는 시민들의 이야기도 쓰셔야지요.

선생님 말씀으로 기억에 남는 것은 사람의 근본은 뿌리 근과 부지런할 근 두 자라고 하시면서 대부유천 소부유근을 말씀인데 교사가 되어 생각하니 학력신장과 인성교육이더라고요. 그래서 전 창의성을 기르기 위해 돈키호테 같은 삶도 필요하다고 교육목표에 넣은 적도 있지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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