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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 이후 불교

절/서울관문사(금불대)

by ih2oo 2009. 6. 10.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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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9일 화요일

서울금강불교대학 불교학과 2학년

한국불교사 (박영제 교수님 강의) 참고자료

 

1. 1876년(고종 13) 일본과 강화도조약 체곃-불평등조약이었기네 일본의 식민주의 침략의 발판 마련의 결과 낳음

2. 1868년 명치유신 이후 일본의 근대불교는 보수적.국수적.어용적인 성격이 두드러져서 다른 어느 종교보다 

    제국주의 대외침략의 도구로 이용될 소지가 많았음

3. 1877년 부터 일본의 각 종파들은 각처에 포교소나 사찰을 건립하고 조선 승려들을 포섭하거나 개종시키기에

   온갖 노력을 다 기울임

4. 1895년 3월 29일 고종의 명으로승려들의 토성출입금지를 해제-일제당국과 일본승려들의 건의 받아들여

5. 만인염불회

 

6. 경허선사(鏡虛禪師) (1849∼1912)

원효스님이 신라불교의 새벽을 열었다면 경허스님은 서산대사 이래로 근대불교에서 선종(禪宗)을 중흥시킨 대선사(大禪師)였다.

다시 말하면, 거의 기진맥진 쓰러졌던 조선불교의 끝자락에서 다시 화톳불을 켜신 분이다.

'제2의 원효', '길 위의 큰 스님'이라고도 부른다.

어릴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며, 9세 때 과천의 청계사(淸溪寺)로 출가하였다. 계허(桂虛)스님의 밑에서 물긷고 나무하는 일로 5년을 보냈다. 14세때 절에 머문 거사로부터 문맹을 거두었고, 그 뒤 계룡산 동학사의 만화강백(萬化講伯) 밑에서 불교경론을 배웠으며, 9년 동안 그는 불교의 일대시교(一代時敎)뿐 아니라 유학과 노장 등 제자백가를 모두 섭렵하였다. 그리고, 23세에 동학사에서 강백이 되어 전국에서

스님의 강론을 듣고자 학승들이 구름처럼 모였다.

1879년에 옛스승인 계허를 찾아 한양으로 향하던 중, 심한 폭풍우를 만나 가까운 인가에서 비를 피하려고 하였지만, 마을에 돌림병이

유행하여 집집마다 문을 굳게 닫고 있었다. 비를 피하지 못하고 마을 밖 큰 나무 밑에 낮아 밤새도록 죽음이 위협에 시달리다가 이제까지 생사불이(生死不二)의 이치를 문자 속에서만 터득 하였음을 깨닫고 새로운 발심(發心)을 하였다.

이튿날, 동학사로 돌아와 학인들을 모두 돌려보낸 뒤 조실방(祖室房)에 들어가 용맹정진을 시작하였다. 창문 밑으로 주먹밥이 들어올 만큼의 구멍을 뚫어놓고, 한 손에는 칼을 쥐고, 목 밑에는 송곳을 꽂은 널판자를 놓아 졸음이 오면 송곳에 다치게 장치하여 잠을 자지않고 정
진하였다.

석달째 되던 날, 제자 원규(元奎)가 동학사 밑에 살고 있던 이처사(李處士)로부터 "소가 되더라도 콧구멍 없는 소가 되어야지."

라는 말을 듣고 의심이 생겨 그 뜻을 물어왔다. 그 말을 듣자 모든 의심이 풀리면서 오도(悟道)하였다. 그뒤 천장암(天藏庵)으로 옮겨 깨달은 뒤에 수행인 보임(保任)을 하였다. 그때에도 얼굴에 탈을 만들어 쓰고, 송곳을 턱 밑에 받쳐놓고 오후수행(悟後修行)의 좌선을 계속하였다. 1886년 6년 동안의 보임공부(保任工夫)를 끝내고 옷과 탈바가지, 주장자 등 을 모두 불태운 뒤 무애행(無碍行)에 나섰다.

그 당시 일상적인 안목에서 보면 파계승이요 괴이하게 여겨질 정도의 일화를 많이 남겼다.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고, 문둥병에 걸린 여자와 몇 달을 동침하였고, 여인을 희롱한 뒤 몰매를 맞기도 하였으며 술에 만취해서 법당에 오르는 등 낡은 윤리의 틀로서는 파악할 수 없는 행적들을 남겼다. '원효의 파계, 진묵의 곡차'이래 최대의 파격적 만행으로 숱한 무애행(無碍行)으로 범부들을 교화한 이적(異積)은 훝날 그의 제자 한암스님은 뭍스님들에게 '화상의 법화(法化)는 배우데, 화상의 행리(行履)는 배우는 것은 불가하리니...'라고 경책하였다.

이러한 이행(異行)은 크게 깨달은 스님과 같이 서투르게 깨달은 체하지 말라는 말이다.

그는 생애를 통하여 선(禪)의 생활화·일상화를 모색하였다. 산중에서 은거하는 독각선(獨覺禪)이 아니라 대중 속에서 선의 이념을 실현하려고 하였다는 점에서 선의 혁명가로 평가받고 있다. 법상(法床)에서 행한 설법뿐만 아니라 대화나 문답을 통해서도 언제나 선을 선양하였고, 문자의 표현이나 특이한 행동까지도 선으로 겨냥된 방편이요, 작용이었다. 그의 이와같은 노력으로 우리나라의 선풍은 새로이 일어났고, 그의 문하에 한암, 만공, 수월, 혜월 등 많은 선사들이 배출되어 새로운 선원들이 많이 생겨났다.

오늘날 불교계의 선승(禪僧)들 중 대부분은 그의 문풍(門風)을 계승하는 문손(門孫)이거나 간접적인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는 근대불교사에서 큰 공헌을 남긴 중흥조이다. 승려들이 선을 사기(私記)의 형식으로 기술하거나 구두로만 일러 오던 시대에 선을 생활화하고 실천화한 선의 혁명가였으며, 불조(佛祖)의 경지를 현실에서 보여준 선의 대성자이기도 하였다. 근대 선의 물결이 그를 통하여 다시 일어나고 진작되었다는 점에서 그는 한국의 마조(馬祖)로 평가된다.

만년에 천장암에서 최후의 법문을 한 뒤 사찰을 떠나 갑산(甲山)·강계(江界) 등지에서 머리를 기르고 유관(儒冠)을 쓴 모습으로 살았으며, 박난주(朴蘭州) 라고 개명하였다. 그곳에서 서당의 훈장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1912년 4월 25일 새벽에 '마음달 외로이 둥그니 빛이 만상을 삼켰구나. 빛과 경계를 함께 잊으니 다시 이것은 무엇인가.' 임종게를 남긴 뒤 입적하였다. 나이 64세, 법랍 56세 이다. 저서에는 <경허집> <선문촬요> 등이 있다. * 참고문헌: '황원갑의 고승과 명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부다피아',

http://kin.naver.com/detail/detail.php?d1id=6&dir_id=60302&eid=BZYyQM5/uBPBnPZNOdRRgUvLAPv8RZZ5&qb=6rK97ZeI7Iqk64uY&enc=utf8§ion=kin&rank=1&sort=0&spq=0&pid=fAJ/Mdoi5UKssaDdfRRsss--086658&sid=Si7@p6rpLkoAABxGMfo

 

7. 조선총독부의 사찰령 반포

    1911년 6월 3일 공포 ( 전문 7조와 부칙)

    1911년 7월 8일 시행규칙 공포(전문 8조와 부칙)

       제1조; 사찰을 병합, 이전 또는 폐지하고자 할 때 조선총독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사찰 전체를 통제하고자 함)

      시행규칙은 주지의 선발방법, 교체절차 및 임기 등를 규정하는 구체적 조치로서 주지를 통한 한국불교의 통제택임

   일제의 사찰령으로 인하여

       한국불교는 30본산으로 통폐합되고 말사로 재편되어 철저하게 총독과 도장관의 지배하에 들어가

       본연의 자율적인 기능이 상실했다.

 

8. 조선불교 총본산의 탄생

   1940년 11월 조선불교선교양종 대신 조선불교조계종 인가

   1941년 6월 조계종 종정 방한암 선출

 

9. 해방 이후의 불교계

   1962년 대한불교조계종 정식 출범

   1967년 천태종 등록

   1970년 5월 태고종 창종

 

   조계종-동국대학교, 승가대학교    불교신문

   천태종-금강대학교                     금강신문

   진각종-위덕대학교

   태고종-동방불교대학                  한국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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