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서울관문사(금불대)

밀교 리포트 자료

ih2oo 2009. 11. 12. 12:07

1. 현교와 밀교의 차이점

2. 밀교의 수행체계

3. 밀교 성립의 배경

이상 세 가지중 택일하여 자유로히 12월 2일 까지 제출

 

현교와 밀교의 차이점

 

1)밀교(密敎)의 뜻
밀교는 秘密佛敎를 줄여 부른 말이며, 身密, 語蜜, 心密의 3밀로 요약되며,
- 身密은 붓다의 신체적 비밀로 32상 80종호를 비롯해 형태,색깔, 장신구, 수인 등을 말한다.
- 語蜜은 붓다의 언어적 비밀로 진언, 다라니, 種子등을 말한다.
- 心密은 붓다의 마음의 비밀로 붓다의 지혜와 삼매의 세계, 중생을 구호하려는 자비심 등을 가리킨다.


2) 현교와 밀교
현교란 전문적인 밀교가 성립하기 이전의 모든 불교영역을 가리키는 말로 주로 중생의 근기에 따라 부처님이 설한 교를 현교(顯敎)라 한다.
밀교란 교설로 표현되지 아니하는 다라니, 진언, 밀언, 만다라, 의식 등 三密의 형태를 통해 직접 법신(佛性)을 깨우치는 敎를 말한다.
3) 밀교는 붓다의 지혜와 자비를 포함한 내면적 세계와 궁극적 세계를 다루고 있으므로 대승불교의 가장 발달된 형태로 볼 수 있다.
2. 밀교의 태동
밀교가 나타난 것은 인도사회의 시대적 변화에 그 원인이 있다. 서민대중이 복잡한 교리나 사변적 철학보다 단순하고 실천하기 쉬운 종교를 택하게 되어 종래의 바라문교가 힌두교로 바뀌게 되었고, 그 교세가 인도 전역에 퍼져나가게 되었다. 이에 위기의식을 가진 대승불교가 힌두교의 장점을 과감히 도입하게 된 것이다.
밀교는 인도 고대 종교의 영향을 받아 대승불교에 도입된 것이다. 즉 고대 바라문에서 행해지던 제례나 외부적 주술, 천문과 점성 등의 종교행위가 기원 전후로 대승불교가 성립하면서 대중교화의 한 방편으로 도입된 것이다. 특히 기원후 3~4세기 경 대승경전은 크게 密敎化 하여 주술과 다라니를 중심으로 전문화 되었다.


3. 밀교의 가르침 주요내용
- 밀교의 교리에 따르면 인간은 無明에 싸여 있으나, 아직도 佛性이라고 하는 신성한 불씨를 그 안에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 무명에서 벗어나려면 비밀스러운 淨化儀式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 정화의식은 고대 인도신화로부터 가지고 온 것이다. 불교의 밀교경전과 힌두교의 밀교경전은 본래 하나의 근원에서 나왔다.
다만, 불교의 밀교에서는 “신이나 악마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단지 우리들의 환상의 산물일 뿐”이라는 大乘의 空의 개념을 도입하였다.
- 밀교는 그 시대의 요구에 부응해서 발전되어 갔으며, 초기 진언과 주술적 現世 求福的 밀교에서 顯密을 동시에 중시하는 밀교로 또 則身成佛을 주로 하는 밀교로 거듭 변천해 왔다.

 

http://blog.naver.com/jalmisanone/90013709329

 

http://blog.daum.net/skyh2o/13308608

 

밀교의 수행체계

密敎는 대체적으로 印度佛敎史의 역사적 흐름으로 보았을 때 大乘後期에 나타난 佛敎로 理解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래서 密敎를 기존의 佛敎와는 성격을 달리하는 것으로 이해하거나, 또 密敎가 大乘의 마지막 단계라는 점에서 인도불교 멸망의 주된 책임자로 폄하하거나 불교의 타락된 면을 가장 농후하게 지녔다는 비판을 들어왔다.

그러나 밀교는 기존 불교와 다르지 않으며, 오히려 敎學的인 繼承과 發展을 보이는 佛敎敎理의 綜合이라고 말할 수 있다. ?大日經? ?金剛頂經?에 보이는 교설에서 原始와 小乘‧大乘佛敎의 敎理와 修行方便을 총체적으로 설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즉 밀교에서 中觀과 唯識의 發展된 敎學이 다양하게 종합되고 체계적인 수행방편으로 정리되는 계기를 맞게 되고, 이러한 과정에서 기존의 대승불교내에 유입된 인도고대 문화를 종합적으로 적극 수용하면서 大乘敎學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修行法을 제시하였다. 그것이 三密修行이었다. 그 삼밀수행의 구체적인 방법이 만다라를 통한 佛의 三密과 衆生 三密이 相應加持하여 合一되는 것이었고, 이 三密修行의 구체적인 作法이 曼茶羅建立과 灌頂, 供養, 護摩 등이었다.

이와같이 密敎의 修行體系는 身口意를 기본으로 한 三密加持修行을 방편으로 삼고 있으며, 그 구체적인 方便이 結印, 眞言, 觀想法이다. 즉 三密行이란 중생의 기본적인 세 가지 활동이 바로 부처임을 아는데서 그치지 않고 미혹한 衆生世間의 日常生活과는 다른 차원의 활동이 가미되 구체적으로는 손으로 印契를 맺는 身密, 입으로 眞言을 외우는 口密, 정신을 집중하여 신앙의 대상을 觀想하는 意密을 동시에 행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大日如來의 三密과 修行者의 三密이 일치되어 成佛의 境地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密敎의 수행목적은 바로 究竟에는 佛地에 이르고자 함에 있으며, 이와동시에 現世利益的인 制災招福과 所願成就의 修行方便도 보이고 있다. 그래서 密敎의 修行은 三密을 통해서 般若와 方便의 雙修를 보여주는 독특한 修法體系라고 할 수 있다.

이와같이 三密加持를 修行體系로 삼고 있는 密敎의 修行階位는 무엇인가? 그것은 兩部經典에서 나타나는 原始‧小乘, 大乘佛敎의 敎說과 修行方便의 종합이란 면에서 엿볼 수 있다. 즉 밀교는 이를 모두 總攝하여 한층 더 높은 修行道를 보여주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華嚴의 法界思想이 밀교에서는 曼茶羅로 나타났으며, 曼茶羅에 引入하는 것은 곧 華嚴의 初發地에 배대되고 있다. 또 華嚴의 十地思想을 계승‧발전한데서 密敎의 修行階位를 가늠해 볼 수 있는데, 그것이 大乘 菩薩道(第八地 不動地)였다. 즉 菩提心에서 모든 佛智가 생겨난다고 한 점에서 바로 華嚴의 初發地를 계승하고 있음을 볼 수 있고, 여기에 한걸음 더나아가 밀교에서는 諸法을 無生法忍으로 보고, 華嚴 十地 가운데 한 수행방편인 無生法忍을 얻는 菩薩道(第八地 不動地)를 修行階位로 삼았음을 볼 수 있다.

http://kr.blog.yahoo.com/dkekektk/23

 

 

 

밀교의 설립배경

 

밀교의 성립배경
   
밀교, 곧 秘密佛敎(Tantric Buddhism)는 淨土信仰과 더불어 대승불교의 중요한  사상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밀교가 서기 7세기쯤에 印度에서 성립되기까지는 교학적으로나 교단사적으로 매우 복합적인 원인과 배경 을 갖고 있었다.
역사적 입장에서 보면, 불교가 성립되었던 B.C 6C 전까지만 해도 印度는 바라문교(Brahmanism)의 독무대였다. 그러나 佛敎의 출현으로 인하여 바라문교는 직접 간접으로 많은 타격을 받게 되었고, 그 세력도  차 위축되는 추세를 면치 못했다. 舍利弗, 目雜連 등과 같은 바라문의 대지도자들이 수많은 제자를 거느리고 불교로 전향한 것은 하나의 좋은 예라 하겠거니와, 이후 불교는 날로 번성하게 되었다. 이렇게 1세기 반 동안 발전을 거듭해 왔던 불교도, 부처님께서 돌아가신 후 100年頃부터 교단이 분열되고 B.C. 1세기경까지 部派間의 대립이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불교교단은 이론 중심의 불교, 승려중심의 불교로 흘러가게 되었다. 불교가 이러한 상황에 빠져 있을 동안 바라문교는 民間信仰을 흡수하고 불교사상을 모방하여 일반적이고 통속적인 宗敎(Hinduigm)로 재정비하여 비상한 세력으로 民間에 널리 보급되었다.
 민중신앙의 입장에서 바라문교의 세력 확장은 자연히 불교교단의 약세를 가져오기 마련인데, 이러한 바라문교의 상황에 대비하여 불교에서는 婆羅門敎, 힌두 敎, 民間信仰의 사상을 폭넓게 受容하여 佛敎적으로 재정립한 것이 密敎의 출발이었다. 諸天思想 ·眞言 ·觀音信仰을 위시한 菩薩(bodhisattva)思想 등은 모두가 이러한 영향 속에서 불교가 創案했거나 受容한 사상들인 것이다. 특히 眞言은 밀교의 중심교학을 이루고 있는데 그 연원은 멀리 리그베다에까지 소급된다.
 바라문교의 성전인 4베다(Veda)에서는 많은 明呪와 秘法이 나타나 있는데, 불교에서는 처음에 이러한 것들을 부정하는 입장을 취하였다.그리하여 초기불교에서는 '세속의 呪術秘法을 행하면 波逸提
를 犯한다. " 또는 "세속의 明呪密法은 축생의 學이다. "라고 하여 금지시키고 있다. 그러나 교단 구성원 중에서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 등이 이러한 呪文을 외우고 密法을 행하는 자가 점점 늘어가게 되었다. 그러자 十誦律, 四分律같은 데서는 수양을 하는 데 도움이 되는 治毒呪, 腹痛呪와 같은 呪法은 행해도 좋다는 선별승인을 하게 되었고, 후에는 민간비법과 바라문교의 呪法을 받아들이거나 이를 모방하여 불교 특유의 眞言을 창안해냄으로써 밀교성립의 기반이 조성되었다.
 이상과 같은 역사적 상황이 밀교성립의 외형적 조건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결코 근본적인 동기나 배경은 아니었다. 밀교가 성립하게 된 보다 근원적인 동기는 불교 자체의 교학적인 발전에 있었다.
 초기 대승불교의 시기에는 般若經(반야경)계통의 空思想을 주축으로하는 龍樹系의 中道思想이 나타났었는데 이 학파를 中觀學派라고 하였다. 중관학파에서는 인간의 心性이 본래 말고 깨끗하다는 '心性本淨說'과 '空思想'의 입장을 조직적으로 밟히고 있다. 그러나 이중관계에서는 아직 개인의 心識에 관한 연구는 나타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대승불교의 중기쯤에 오면, 解深密經의 有思想을 주축으로 한 無着, 世親(Vasubandhu)등이 중심이 되어 衆生의 一心을 중요시하는 '心識說'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학파를 瑜伽唯識派라고 하는데,밀교는 중관과 유식학파의 중심사상을 동시에 계승 발전시켰으며 아울러 그 兩學派의 결합을 보완하여 성립된 것이다. 따라서 밀교는 華嚴經이나 法華經의 사상을 계승하고 起信論의 眞如緣起說을 더욱 발전시켯다는 점에서 그 사상적 특성과 가치가 있는 것이다.  

 

 밀교사상의 성립배경


밀교는 부처님 당시에서의 근본불교경전에서부터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이유에 대하여서는 부처님 당시에는 주술이나 주법 주문을 외우는 것을 금지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벼이든 자에게 병을 치료하는 데 있어서는 약사경을 설 하시에 약사경을 읽으면 병이 치료가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밀교의 실질적인 흐름-신밀·구밀·의밀의 정비-은 「대일경」과「 금강정경」이라 고 하는 커다란 두 경전의 완성에 의해서 하나의 전기를 맞았다. 밀교는 이 두 경전을 주로하여 독립되었다. 「대일경」이 전개하는 불의 세계를 「태장계」라 하고「금강정경」이 전개하는 불의 세계를 「금강계」라 하는 데 이 두 경을 합해서「양부대경」(兩部大經) 이라고 한다.

「대일경」은 「대비로자나성불신변가지경」(大毘盧遮那成佛神變加持經)의 약칭이다. 「대일경」의한 역본은 7권 30품으로 되어 있는데 처음 6권 32품이 완성되고 그 다음에 제7권의 5품이 보충되었다고 보고 있다. 티벳어의 역본은 한역의 6권에 해당하는 것만 36품으로 되어있고 7권에 해당하는 부분은 논부에 따로 편입되어 있다. 」1) 는 것은 밀교경전에 대한 이론서가 무수히 많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한역경전으로서는 「다라니집경」(多羅尼集經), 「일자불정륜왕경」(一字佛定輪王經), 소설지경(蘇悉之經) 등이 그것이다. 또한 티벳역으로서 남아있는 「금강수관정 딴뜨라」, 「금강최파다라니」「상선정품」(上禪定品), 「저리(底理) 삼매야 딴뜨라」등도 대일경의 성립에 적지 않은 소재를 제공한 것으로 보여진다.」 2) 고하였다.

「밀교경전의 성립과정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경전의 수, 번역연대를 기준으로 하여 도표를 만들어 보는 것이 이해하기 쉬우리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인도의 밀교이지만 인도의 자료든지 인도의 문헌에서는 대단히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에 부득이 중국에서 번역된 한역불전(漢譯佛典) 속에 있는 밀교경전을 분류하여 역으로 인도밀교의 성립과정을 추측하는 방법입니다.

年|222   280     316       420        581     618     716      800       960    1030

國|吳       | 西晋 |  東晋  | 南北朝 |  隋   | 初唐 |  中唐 |  後唐  |  宋  |

--+---+-----+-----+-------+-----+------+-----+------+-----+------

譯|    4    |     2    |  18  |      27     | 10 |    63     | 200 |37|120 |」經|

數|

3)

위의 논을 보면 밀교의 연구는 일본에서 선행되었다, 그리하여 밀교경전에 역사성도 일본불교의 번역서를 참조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연구자들이 밀교경전에 대한 번역에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일본불교에서 밀교에 대한 연구를 하였다고 하여 과소평가 하여서는 아니 된다, 어디까지나 학문의 입장에서 논해야 하기 때문이다,  

「밀교는 비밀불교의 줄임말로서 비밀로 설해진 가르침이라는 뜻이니, 현교와 상대적 개념을 지닌 말로 간주되고 있다. 이 밀교는 비밀승(guhyayana)이라고 번역되었는데 그밖에 밀장·다라니교·금강승 등으로도 불렸고 근래 서양에서는 탄트라불교(Tantric Buddhism)로 부르고 있다. 탄트라 불교는 7, 8세기경 불교에 인도적인 요소가 가미된 것으로서 오늘날 네팔이나 티베트 등지에서 행해지고 있는 밀교를 위주로 한 말이다. 탄트라는 원래 주술적 신비적 의궤를 가르치는 전적(典籍)의 총칭으로서, 」4)

「소승불교의 교리적 체계와 대승불교의 실천적 교학을 더욱 발전시켜 체계화하고 상징화하여 강한 실천력을 내세운 것이 바로 밀교였다.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밀교는 대승의 교리를 실천적 교학으로 더욱 발전 체계화 하였다. 즉 성불의 경지를 상징화하여 불교교리와 실천을 구체적으로 도식화 상징화 의궤화하였다. 다양한 의궤작법이 산출되었으며 이것은 수행의 대상이었고 동시에 구경성불의 수행방편이었다.」  http://cafe.naver.com/pkrmdd.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121

 

 

밀교(密敎)의 발생과 인도(印度)에서의 전개과정
인도에서의 약 1700년에 달하는 불교의 역사를 간략하게 짚어 보자면 먼저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시면서 직접 제자들을 지도하셨던 45년 동안의 시기인 초기불교(初期佛敎=근본불교)가 있었고, 불멸(佛滅) 후 비교적 석가모니 부처님이 생존(生存)해 계실 때와 불교의 모습이 비교적 잘 지켜져 그 원초성(原初性)과 원시성(原始性)이 보존되었던 100년 동안의 원시불교(原始佛敎)의 시기, 그 다음 약 600년간 많은 부파(部派)와 분파(分派)가 각자 독특한 교리체계(敎理體系)를 세우며 실천하고 정착화(定着化) 했던 시기인 부파불교(部派佛敎) 시대가 있었다.
이러한 부파불교가 출가수행자(出家修行者)의 개인 수행과 아비달마 연구에 빠져 대중과 유리되어 가자 의식있는 재가불자(在家佛子)들과 진보적 승려들이 이를 소승(小乘)이라 비판하면서 '근본불교(根本佛敎)'로의 회기를 내세우며 보살이 주체가 되어 일반 대중이 함께할수 있는 대승불교(大乘佛敎)운동이 아주 강력하게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대승불교시대가 300여년이 계속되었다. 이때부터 불교의 자비정신이 최고로 고취되었고 대승불교가 성숙할 무렵에 밀교의 모습이 들어나기 시작한다.
대승불교가 중관(中觀)과 유식(唯識)과 같은 고도의 관념체계를 가지고 현학적으로 흘러가면서 다시 대중과 유리 되어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때에 굽타왕조(320∼500년경)가 등장하면서 바라문교를 국교(國敎)로 정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굽타왕조의 치하에서도 번영을 누릴 수 있었던 불교였지만 브라만교의 영향을 피할수는 없었다. 일찌기 불교에 의해서 크게 타격을 받았던 바라문교는 민간신앙(民間信仰)과 혼합하고 또 인도의 사회조직(社會組織)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힌두이즘으로 부흥(復興)하였는데, 재가신도를 중심으로 형성된 대승불교의 교단(敎壇) 안에 민중의 일상생활 규범이 부지불식간에 스며든 것도 그다지 이상한 것은 아니다.
이러한 당시 대중들에 퍼져있던 주술과 신비주의적 의식을 수용하여 밀교가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밀교 700년의 시기가 지속되었다. 예배(禮拜)의 의례(儀禮), 공양(供養)의 방법, 브라만의 종교의례, 주술(呪術) 등도 불교에 흡수되었다. 인도의 모든 토속 신들이 불교의 세계로 흡수되어 불교의 불·보살·명왕(明王)·제석천·범천(梵天)·팔부신중(八部神衆 등으로 환생(還生)되었다. 이러한 흰두이즘의 종교적 특징으로 7세기 중엽부터 대승불교는 급격히 밀교화되었다.
인도에 있어서 불교의 쇠퇴는 외적인 요인으로는 이슬람교도의 인도 침입으로 온 여파(餘波)이다. 이슬람교도의 인도 원정은 이민족(異民族)의 이슬람교로의 개종(改宗), 노예와 물자의 약탈이 주된 목적이었으므로 점령지(占領地)를 오랫동안 지배하지는 않았지만 불교나 힌두교의 사원(寺院)과 성지(聖地)를 파괴하고 보물을 약탈했으며 승니(僧尼)를 학살했다. 13세기 초 비크라마시라 사원이 파괴되면서 불교는 인도 본토로 부터 그 모습을 감추어 버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외적인 요인 보다도 더 근본적인 원인은 불교의 세력이 가장 왕성하였을 때 조차도 불교는 바라문교를 완전히 압도하지 못했으며 바라문교가 힌두이즘으로 부흥함에 따라 불교는 점차 힌두화되어 마침내는 본질적(本質的)으로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에 있다.

http://kin.naver.com/open100/db_detail.php?d1id=6&dir_id=60302&docid=264436&qb=67CA6rWQIOyEseumveydmCDrsLDqsr0=&enc=utf8§ion=kin&rank=1&sort=0&spq=0&pid=fYW2Sdoi5Twsssxw5a8sss--323125&sid=SvtZCPtB@0oAABYrH1U

 

 

http://blog.daum.net/potaehwasao/11782036

 

http://blog.naver.com/hanwee?Redirect=Log&logNo=50002340781

 

http://blog.naver.com/sofour/40015417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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