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탑은 신라시대의 일반적 석탑에서 고려시대의 화력하고 장식적 공예탑으로 넘어가는 초기의 작품이다. 완전한 모습은 아니지만 각 층의 체감비례가 적절하고, 옥개석의 조각이 섬세한 점 등이 이후 고려시대의 공예탑이 지니는 초기적 수법을 간직하고 있다.
(금산사 대적광전)
(금산사 대적광전 설명문)
미륵전의 서쪽 즉 가람의 중심에 대적광전이 자리한다. 대적광전은 연화장세계의 주인인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본존불로 모신 건물이다. 화엄종의 맥을 계승하는 사찰에서는 주로 이 전각을 본전으로 건립하며, 『화엄경』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하여 화엄전, 비로자나불을 봉안한다고 해서 비로전이라고도 부른다. 현재 대적광전 건물은 앞면 7칸, 옆면 4칸의 다포식 팔작지붕으로 조선시대 건물이었으나 1986년에 화재로 전소된 후 1994년에 본래대로 복원하였다. 원래 대웅광명전(大雄光明殿) 또는 대법당이라고도 불렀다. |
신라 때 진표율사가 창건하면서 지금의 미륵전을 금당(金堂)이라고 기록한 것을 보면 아마도 이 자리에는 법당이 들어서 있었을 것이다. 대적광전이 지금의 웅장한 규모를 갖게 된 것은 정유재란 때 절이 전소된 후 1635년 수문대사의 중창에 의해서였다. 이후 영조 52년(1776)에 금파대사의 법손인 두월장로가 중수하였고, 1926년과 1938년 미륵전 보수시에 수리되었다. 수문대사가 중창할 때 따로따로 모셨던 비로자나불, 노사나불,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약사여래불과 여섯 보살을 함께 모심으로써 대적광전 하나로 통합해 창건하였던 것이다. 거대한 규모이면서도 날렵한 느낌을 주는 것은 이러한 한국 전통건축의 기능적, 예술적 지혜 덕택이다. 금산사가 미륵전을 토대로 미륵신앙을 표방하였지만 한국불교의 이러한 통불교적 경향은 고려시대 이후 반영되었을 것이다. 그 뒤 조선시대에 들어와 마침내 대승불교의 대표적 부처와 보살을 모두 수용한 대 전각을 건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외부 정면 처마 아래에 걸린 「대적광전」 편액은 석전(石田) 황욱(黃旭, 1898~1993)이 1991년 쓴 글씨다. 전라북도 고창에서 태어난 황욱은 붓을 손가락으로 잡는 것이 아니라 손바닥으로 잡고 붓 맨 윗부분을 엄지손가락으로 꽉 눌러쓰는 이른바 악필법(握筆法)을 창안하였는데, 이 편액의 글씨 역시 이러한 악필법으로 황욱의 글씨로는 이 외에 구례 화엄사(華嚴寺)의 일주문에 걸린 「대화엄사(大華嚴寺)」와 「해동선종대가람(海東禪宗大伽藍)」 편액 등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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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적광전의 내부 불단에는 비로자나불을 비롯한 5여래와 그 협시로서 6보살을 봉안하였다. 5여래는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왼쪽에서부터 아미타불.석가모니불, 노사나불 그리고 약사불이다. 6보살은 역시 왼쪽에서부터 대세지보살, 관음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 일광보살, 월광보살이다. 대적광전에는 일반적으로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한 삼신불(三身佛)을 봉안하여 연화장 세계를 상징하게 된다.
삼신은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을 말한다. |
금산사의 대적광전에는 특이하게 5여래 6보살이 모셔진 것이다. 이는 한국의 불교의 특징인 통불교(通佛敎)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불타의 진리를 깨우치기 위해서 어느 하나의 사상이나 종파에 치우침이 없었고, 선과 교가 둘이 아님을 일찍부터 체득했던 때문이다. 전국의 명산대찰 어느 곳을 가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다. 왼쪽 벽에는 1991년 당시 주지 월주 스님과 증명(證明) 월산 스님이 조성한 신중탱화를 봉안하였다. |
(금산사 명부전)
(금산사 명부전의 설명)
대적광전의 좌측으로 대장전과 나란히 명부전이 서 있다. 명부전은 저승의 유명계(幽冥界)를 사찰 속으로 옮겨 놓은 전각이다. 이 전각 안에 지장보살을 봉안하고 있기 때문에 지장전(地藏殿)이라고도 하고, 유명계의 심판관인 시왕(十王)을 봉안하고 있기 때문에 시왕전이라도 한다. 명부전은 앞면과 옆면 각 3칸씩의 맞배지붕 건물이다.안에는 지장삼존, 곧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하여 무독귀왕, 도명존자를 봉안했는데, 지장보살은 왼손에 금강보륜을 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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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장삼존의 좌우로는 시왕상 10구와 판관, 녹사, 인왕상, 동자상 각 2체가 명부세계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한편 내부 정면의 출입문 위에는 「금산사시왕전중수기」를 비롯한 현판 9개가 나란히 걸려 있다. |
(금산사 노주)
(금산사 노주의 설명)
대적광전 오른쪽에는 독특한 형태의 노주(露柱)가 있다. 노주란 ‘노반지주(露盤之柱)’의 줄임말로서 처음에는 전각의 정면 귀퉁이에 세우는 두 개의 장대였다가 나중에 탑의 상륜부를 구성하는 부재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는 탑의 일부인 이 노주가 왜 별도의 조성물로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가 없다.
사중기록에 보면 ‘노주’는 잘못 된 명칭이고, ‘광명대(光明臺)’로서 미륵전 앞에서 미륵불에게 광명을 공양하던 석등이었다고 한다. |
이 말이 맞다고 한다면 지금의 모습은 불을 밝히는 곳인 화사석(火舍石)이 없어진 상태가 된다. 고려시대의 조성기법을 간직하고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어 보물 제22호로 지정되었다. |
(금산사 대장전)
(금산사 대장전의 설명)
미륵전의 정면 서쪽에 앞면과 옆면 각 3칸씩의 다포식 팔작지붕인 대장전(大藏殿)이 자리한다. 이 전각은 보물 제827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장전은 본래 진표율사가 절을 중창하면서 세워졌다. 미륵전을 짓고 이를 장엄하는 정중목탑(庭中木塔)으로서 가운데에서 우측부분에 위치하였으며 정팔각원당형으로 조성했던 건물이다. 당시의 양식은 탑과 같이 산개형(傘蓋形)의 층옥(層屋)으로서 맨 꼭대기 옥개에는 솥뚜껑 모양의 철개(鐵蓋)를 덮고, 다시 그 위에 불꽃 모양의 석조 보주(寶珠)를 올렸다. |
그 뒤 조선시대에 들어와 1635년(인조 13)에 가람을 중창하면서 본래 목탑이었던 것을 지금과 같은 전각의 형태로 변형하면서 대장전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지금의 위치로 이전된 것은 1922의 일이다. 이렇듯 여러 차례 변화가 있었지만 전각 꼭대기에는 복발과 보주 등이 아직 남아 지금도 신라 때의 목탑 양식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삼면의 벽은 모두 10폭의 벽화로 장엄하였는데, 흔히 볼 수 있는 십우도나 극락세계의 장엄 등이 아니라 구체적 인물과 사건이 등장하는 모습이다. 몇 개만 열거하면 ‘오달국사인명창’, ‘저지화상도담’, ‘치계전생담(雉鷄前生譚)’, ‘부설거사도술담(浮雪居士道術譚)’, ‘용파수상행(龍波水上行)’, ‘희운선사행적기(喜運禪師行迹記)’ 등이다. 또한 외벽에도 좌우로 벽화가 그려져 있다. 한편 대장전의 내부 출입문 위에는 1974년 건물을 중수할 때 참여한 사람들의 인명과 불상의 개금불사에 시주한 사람들 이름을 적은 현판이 걸려 있다. |
(금산사 조사전)
금산사의 중창조이신 진표율사 부터 역대 조사 열두 분 스님의 영정을 봉안한 건물로서
1998년도에 건립하였다
(금산사 나한전)
(금산사 나한전의 설명)
대적광전 뒤에 나한전이 있다. 소승불교의 최고의 경지에 오른 나한에 대한 신앙을 하는 전각이다. 나한은 아라한(阿羅漢)의 준말로서 의역하여 살적(殺賊), 응공(應供), 응진(應眞)이라 한다. 살적은 수행의 적인 모든 번뇌를 항복받아 죽였다는 뜻이며, 응공은 인간과 천상의 공양을 받을 만하다는 뜻이며, 응진은 ‘진리에 상응하는 이’라는 의미이다. 일반적으로 나한전에는 석가모니불을 주불(主佛)로 하여 보통 5백인을 모신 오백나 한전과 16나상을 모신 응진전으로 대별된다. |
원래 금산사의 나한전은 방등계단과 오층석탑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이곳에서 계단을 참배하였기 때문에 계단예배전(戒壇禮拜殿)이라고도 불렀다. 안에는 석가여래를 본존으로 하여 문수, 보현보살을 봉안하였다. 또한 석가여래의 여러 제자 가운데 으뜸이라고 하는 아난과 가섭을 모셨고, 16나한상과 2인의 시자상도 목조로 조성하였다. 그리고 전각이름에 걸맞게 소형의 오백나한상을 계단식의 단을 마련하여 가득히 봉안하였다. |
(금산사 삼성각)
방등계단과 5층 석탑의 동쪽으로 적별보궁과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삼성각은 산신(山神), 칠성(七星), 독성(獨聖)을 함께 봉안하고 있는 전각이다. 산신은 재물, 칠성은 수명, 독성은 복을 관장하는 존재로 알려져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면적은 19.96 평방미터이고 형태를 띠고 있다.
(금산사 방등계단 사리탑)
(금산사 방등계단 사리탑의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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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대(松臺)라고 부르는 미륵전의 북쪽 높은 대지에 방등계단(方等戒壇)이 있다. 또한 이 계단의 중앙에 보물 제26호인 부도가 1기 있어 그 형태에 따라 석종형(石鐘形) 부도라고 부른다.
방등계단의 수계법회(受戒法會)를 거행할 때 수계단을 중앙에 마련하고, 그 주위에 삼사(三師)와 칠증(七證)이 둘러앉아서 계법을 전수하는데 사용했던 일종의 의식법회 장소이다. 이러한 예는 경상남도 양산의 통도사 와 개성의 불일사(佛日寺) 등지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한국 불교의 독특한 유산이다. |
불교의 정신을 대표하는 계(戒).정(定).혜(慧) 삼학(三學) 가운데 계는 으뜸으로서 계를 지킴은 불교의 기본 토대가 된다. 이 계의 정신이 일체에 평등하게 미친다는 의미에서 방등계단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한편 방등계단의 성격을 도솔천(兜率天)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즉 미륵신앙의 근본도량인 금산사에는 미륵의 하생처로서 미륵전을 조성하고, 그 위에 도솔천을 구현하여 미륵상생신앙을 나타냈다는 말이다. 결국 금산사는 미륵상생신앙과 하생신앙을 조화롭게 겸비하였다는 신앙적 성격을 지녔다는 뜻이 된다.
조선조 생육신의 한 사람이었던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이 절을 찾아 이곳 방등계단에서 남긴 시가 한 수 전한다. |
(금산사 오층석탑)
(금산사 오층석탑의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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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전의 북쪽 위 송대에 보물 제25호인 오층석탑이 자리한다. 정사각형 판재를 이용한 이 석탑은 높이가 7.2m로서 소박하고 단순한 구조를 지녔다. 본래 기록에 따르면 9층이라 하였는데 지금 남아있는 옥개석의 형태나 체감율 등에서 6층 이상이 손실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설에 따르면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금산사를 창건하면서 이 석탑을 건립하였을 것이라 하나 이는 잘못된 것이고, 고려시대에 조성되었다는 확실한 기록이 전한다. 즉 1971년 11월에 석탑을 해체 수리하는 과정에서 〈모악산금산사오층석탑중창기〉가 발견되었는데, |
그 내용 가운데 979년(경종 4)에 시작하여 981년에 완성했다는 사실이 보인다. 한편 탑 속에서는 중창기와 함께 금동관음상을 비롯한 여러 소불상이 발견되었는데, 이 탑의 복장품은 현재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다. |
(금산사 적멸보궁)
(금산사 적멸보궁의 설명)
방등계단 옆의 옛 나한전 자리에 세워진 예배각(禮拜閣)으로 유리벽을 통하여 방등계단에 있는 사리탑에 경배하며 예불을 드리는 곳이다.
불전 내부에는 따로 불단을 차려 불상을 봉안하지 않았는데, 이러한 예는 통도사 대웅전과 같은 경우이다.
(금산사 당간지주)
(금산사 당간지주의 설명)
금강문에서 동북쪽으로 50m쯤 떨어진 곳에 보물 제28호로 지정된 당간지주가 있다. 절에 중요한 행사나 법회가 있을 때 깃발을 걸어서 이를 알리는 일종의 안내판이 당간(幢竿)이고, 이를 지탱하는 것이 지주(支柱)이다. 그래서 당간지주는 반드시 절의 입구에 놓이게 마련이다. 장방형의 계단식 3층 기단과 그 위에 당간을 받치고 있던 간대(竿臺), 지주를 놓던 기단석 등이 잘 남아 있다.
정연한 기단부와 지주의 다양한 조각 등이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당간지주 가운데서 가장 완성된 격식을 갖춘 작품이다. |
지주에 세 곳의 홈을 마련한 예는 익산의 미륵사지와 경주 보문리 당간지주에서도 볼 수 있어 같은 조성연대, 곧 8세기의 조성으로 추정된다. 한편 진표율사가 절을 중창한 것이 766년(혜공왕 2)의 일이므로 당간지주의 조성시기를 이 무렵으로 보아도 틀리지 않을 것 같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