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서울관문사(금불대)

3월 31일 한국불교사 (박영제 교수님)

ih2oo 2009. 4. 2. 14:23

2009년 3월 31일 한국불교사 (박영제 교수님)

강의 내용 중

유인물에 나오지 않는 내용을 주로 조사 요약함

 

1. 통도사대웅전및금강계단 (通度寺大雄殿및金剛戒壇)

통도사는 우리 나라 3대 사찰 중 하나로 손꼽히는 큰 절로, 신라 선덕여왕 15년(646)에 자장율사가 세웠다고 한다.
대웅전은 원래 석가모니를 모시는 법당을 가리키지만, 이곳

통도사의 대웅전에는 불상을 따로 모시지 않고

건물 뒷면에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설치하여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다.
그 때문에 통도사라는 절 이름도 금강계단을 통하여 도를 얻는다는 의미와 진리를 깨달아 중생을 극락으로 이끈다는 의미에서 통도(通度)라고 하였다 한다.

 

2. 논산

관촉사의 미륵전에도 불상을 따로 모시지 않고

유리창을 두어 법당안에서 밖의 석불을참배할 수 있도록 되었다.

 

 

3. 미륵보살 [彌勒菩薩] 

http://100.nate.com/dicsearch/pentry.html?s=K&i=246064

대승불교의 대표적인 보살 가운데 하나.

미륵은 친구를 뜻하는 미트라(mitra)에서 파생한 마이트리야(Maitreya)를 음역한 것으로, 자씨(慈氏)로 의역된다. 따라서 미륵보살은 흔히 자씨보살로도 불린다.

불교사상의 발전과 함께 미래불이 나타나 석가모니 부처님이 구제할 수 없었던 중생들을 남김없이 구제한다는 사상이 싹트게 됨에 따라 미륵보살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 미륵보살은 인도 바라나시국의 바라문 집안에서 태어나 석가모니불의 교화를 받으면서 수도하였고,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授記)를 받은 뒤 도솔천(兜率天)에 올라가 현재 천인(天人)들을 위해서 설법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 부처가 되기 이전 단계에 있기 때문에 보살이라고 부른다.

그는 석가모니불이 입멸(入滅)한 뒤 56억7000만 년이 되는 때, 즉 인간의 수명이 8만 세가 될 때 이 사바세계에 태어나서 화림원(華林園) 안의 용화수 아래서 성불하여 3회의 설법으로 272억 인을 교화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미륵보살이 도솔천에 머물다가 다시 태어날 때까지의 기간 동안 먼 미래를 생각하며 명상에 잠겨 있는 자세가 곧 미륵반가사유상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특히 삼국시대에 이 미륵반가사유상 불상이 많이 조성되었다.

또한 미륵보살을 신앙하는 사람이 오랜 세월을 기다릴 수 없을 때는 현재 보살이 있는 도솔천에 태어나고자〔上生〕, 또는 보살이 보다 빨리 지상에 강림하기를〔下生〕 염원하며 수행하는 미륵신앙이 우리 나라에서 널리 유행하였다.

현재 미륵보살이 상주하면서 설법하고 있는 도솔천은 지족(知足)이라고 번역되는 하늘로, 지나친 욕심이나 번뇌망상으로 방탕함이 없는 세계이다.

신라의 원효(元曉)는 도솔천에 왕생하여 미륵보살의 제자가 되는 길은 관행인과(觀行因果)에 있다고 보았다. 이 관행은 도솔천의 뛰어난 장엄과 미륵보살이 수행의 결과로 누리는 과보의 뛰어남을 관하는 것이다.

이 관에 수반되는 행으로는 미륵보살을 경애하는 마음으로 이미 지은 죄를 참회하는 것과, 미륵보살의 덕을 우러러 받들고 믿는 것, 그리고 탑을 닦고 마당을 쓸며 향과 꽃을 공양하는 등의 일이다.

우리 나라에는 3000년 설에 입각하여 미륵보살이 대부분 비바람 아래 관을 쓰고 있는 모습으로 많이 조상되어 있다.

4. 전륜성왕

   인도 신화 속의 임금

   정법()으로 온 세계를 통솔한다고 한다.

   여래의 32상()을 갖추고 칠보()를 가지고 있으며 하늘로 부터 금, 은, 동, 철의 네 윤보()를 얻어 이를 굴리면서

   사방을 위엄으로 굴복시킨다.


 

5. 원효 [, 617~686.3.30]

   법명 원효, 압량(:)에서 태어났다. 설총()의 아버지이다. 648년(진덕여왕2) 황룡사()에서 승려가 되어 수도에 정진하였다.  661년 의상과 다시 유학길을 떠나 당항성(:)에 이르러 한 고총()에서 잠을 자다가 잠결에 목이 말라 마신 물이, 날이 새어서 해골에 괸 물이었음을 알고 사물 자체에는 정()도 부정()도 없고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렸음을 대오()하고 그냥 돌아왔다. 그후 분황사()에서 독자적으로 통불교(: · · 등으로도 불린다)를 제창, 불교의 대중화에 힘썼다.

   하루는 거리에 나가 “누가 내게 자루 없는 도끼를 주겠는가? 내 하늘을 받칠 기둥을 깎으리라( )” 라고 노래한 것이 태종무열왕에게 전해져 요석공주()와 잠자리를 같이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설총이 태어났다. 이 사실을 스스로 파계()로 단정, 승복을 벗고 소성거사() ·복성거사()라 자칭, 《무애가()》를 지어 부르며 군중 속에 퍼뜨리자 불교가 민중 속에 파고들었다.  http://100.naver.com/100.nhn?docid=120735

 

6. 신라의 골품제도

   골제와 두품제를 합친 것입니다. 골제는 성골과 진골을 일컬으며, 두품제는 1두품에서 6두품까지는 말한다. 골품이라는 계급에 따라 신라시대에는 자신의 역할이 정해진다. 능력보다는 신분 우선의 사회라는 의미다

 

7. 설총

  설총(薛聰, ?~?)은 통일신라 시대의 대표적인 학자이다. 원효와 요석 공주(태종무열왕의 딸) 사이에 태어났으며, 신라 3문장(三文章 : 强首·薛聰·崔致遠) 중 한 사람이며, 벼슬은 한림(翰林)에 이르렀다.

   어려서부터 유달리 총명하여 널리 경사(經史)에 통했으며, 유학과 한문학에 조예가 깊었다.

 

8 원효의 일심사상

   원효는 전날 그렇게 시원하게 마셨던 물이 오늘에 와서는 왜 토악질을 하게 하는 물이 되었을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거기서 내린 결론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이다. '모든 것은 마음의 조화이다'라는 말이지요. 전날에 시원하게 느낀 것도 그때의 갈증난 마음 때문이요, 오늘 토악질을 느끼게 하는 것도 내가 마음에서 그 물을 역겹다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에서 가지게 되는 매 순간순간의 감정들이 내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보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게 되는 것이라는 것을 원효는 그 사건에서 깨달은 것이다. 이 일로 원효는 천축으로의 유학을 접는다.(모든 것이 내 안에 원인이 있는데 그 답을 밖에서 구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해탈에 이르는 깨달음도 다르지 않다고 원효는 생각한 것이다.)

 

   이때의 '일체유심조'라는 깨달음이 발전하여 원효의 '일심'사상이 된다. 일체유심조는 아직 그 깊이가 깊지 못하고 일상 속에서의 순간적인 깨달음이라면, 일심은 원효가 그때의 일체유심조의 각성을 체계적으로 불교의 교리에 접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으로 비롯해서 나온 것이 원효의 화쟁사상, 원융회통사상이다.

 

   일체유심조와 일심사상은 그 깊이에서 차이가 있지만, 일체유심조의 깨달음에서 일심사상이 싹텄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이 둘 사이를 다르다고 할 수는 없다.

 

 

   통일 신라 초기에 불교계에서 화려하게 활약을 한 사람 중 특히 원효는 한국 불교사에서 가장 독창적인 사상가이자 실천자였다.

 

   삼국통일 이후의 신라 불교학은 원효에 의해 불교 각 경전의 이론이 통합될 수 있었고, 그로 인해 통불교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또한 원효는 <정토신앙>을 대중화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귀족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틀에 매이지 않는 생활로 대중 속에 들어감으로써 역사와 민족의 기억 속에 오래도록 살아남는 최대의 고승으로 자리잡았다. 원효의 정토 구원관은 인간의 평등을 전제로 하고 귀족불교를 전면으로 부정하였다. 그 당시 현실적으로 고통받는 민중에게는 엄격한 계율이나 어려운 이론보다는 정토를 지향하는 염원을 가지고 삶을 이어나갈 의지가 더욱 절실하였다. 이러한 원효의 노력으로 신라의 불교는 점차로 귀족 불교에서 민중 불교로 넘어 오게 되었다. 하지만 한가지 아쉬운 점은 원효가 비록 지배 계급의 소유물이었던 귀족 불교를 타파하고 민중 불교로 이끄는 데는 성공했지만, 당시의 제도적 왕권 불교에 대응하고 정토 실현을 위한 민중의 공동체적 노력을 수정할 수 있는 민중 불교 결사와 같은 조직화를 시도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아미타불 타력 신앙에 의해 숙명적이고 체념적이며, 현실 도피적인 신앙으로 오도될 가능성을 남겼다.

 

   우리 나라에서 주체적 연구를 통해 발전된 신라 불교학으로서의 원효의 불교학은 중국과 일본에 큰 영향을 주게 되었다. 그의 저술은 중국으로 들어가 중국 불교의 존숭(尊嵩)을 받고 그의 실천적 불교 대중화 운동은 일본의 불교 민중화 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9. 지호락(知好樂)

 

    무엇을 아는것은 그것을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그것을 좋아하는 것은 그것을 즐기는 것만 못하다.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

 

            논어(논語) `옹야(雍也)' 

 

10. 화쟁사상 [和諍思想]

      모든 논쟁을 화합으로 바꾸려는 불교사상. 우리 나라 불교의 저변에 깔린 가장 핵심적인 사상이다. 불교교단의 화합을 위한 화쟁과 불교교리의 화쟁으로 대별된다. 교단의 화합을 위한 화쟁은 불교의 계율에 잘 나타나 있다.

 

      원효의 화쟁사상을 계승하여 널리 선양한 고려시대의 고승으로는 의천(義天)이 있다. 그는 원효의 화쟁사상이 ≪법화경≫의 회삼귀일사상(會三歸一思想)과 그 맥을 같이하는 것임을 파악하고, 천태종(天台宗)을 창종(創宗)하여 화엄을 비롯한 여러 교학과 선을 일치 통합하고자 하였다.

 

 11. 십문화쟁론 [十門和諍論]

       대립과 분열을 종식시키고 화합을 이루기 위한 불교적 논리를 집대성한 원효사상의 총결산적인 저술이다. 부처님이 지향한 이론이 무쟁(無諍)의 세계임에 비하여 원효가 지향하는 이론이 화쟁임을 증명하고 있다.

       온갖 모순과 피아(彼我)의 대립, 시비의 쟁론이 모두 끊어진 절대 조화의 세계가 무쟁이라면, 피아의 대립과 모순이 있는 현실에서 모든 대립과 모순 및 다툼을 조화, 극복하여 하나의 세계로 지향하려는 것이 원효의 화쟁사상이다.

       원효는 근본 원리의 실상법(實相法)에 입각하여 불변(不變)과 수연(隨緣), 염(染)과 정(淨), 진(眞)과 속(俗), 공(空)과 유(有), 인(人)과 법(法) 등이 다 일법(一法)·일심(一心)·일리(一理)의 양면일 뿐 원래부터 서로 대립되고 양단된 존재도 이원적 원리도 아니라는 것을 논증한다. 즉, 상대적 세계의 차별은 불완전한 인식 때문이며, 철저한 불이사상(不二思想) 원리를 화쟁사상으로 풀이하고 있다.

 

12. 극락[極樂]

       아미타불이 상주하고 있는 불교도의 이상향인 불국토.

      ‘안양(安養)·무량수불토(無量壽佛土)·무량광불토(無量光佛土)·무량청정토(無量淸淨土)’라고도 한다. 극락은 즐거움만이 있는 곳〔樂有〕이며, 이 즐거움은 아미타불의 본원(本願)에 의해서 성취된 깨달음의 즐거움이다.

     ≪아미타경 阿彌陀經≫에 의하면, 극락세계는 서방으로 기천만 기십만의 국토를 지나서 있는 곳이며, 현재 아미타불이 설법하고 있다고 한다. 여기에 태어나는 사람은 몸과 마음에 괴로움이 없고 즐거움만이 있다. 이 세계는 일곱 겹의 난순(欄楯), 일곱 겹의 타아라나무기둥이 있고, 방울과 금·은·유리·수정의 사보(四寶)로 장식되어 있다. 이 네 가지 보석에 산호·마노·호박을 더한 칠보로 만든 연못이 있으며, 여기에는 여덟 가지 공덕을 구비한 물과 황금의 모래가 깔려 있다.

또한 하늘에서는 음악이 들리고 대지는 황금색으로 아름다우며, 주야로 세 번씩 천상의 꽃이 떨어진다. 백조·공작·앵무 등의 새들이 노래를 부르며, 이 노래는 그대로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노래로 이 노래를 듣는 자들은 모두 불·법·승의 삼보(三寶)를 생각한다. 이 새들은 모두가 아미타불에 의해 화작(化作)된 것이다. 이 국토에는 지옥·축생(畜生)·사신(死神)이라는 명칭이 없고, 깨달음을 얻은 아라한(阿羅漢)이 수없이 많으며, 다음 생에 부처가 될 사람도 한량이 없다.

 

13. 정토[淨土]

      부처가 있는 깨끗한 국토.

      청정토(淸淨土)·청정불찰(淸淨佛刹)·정찰(淨刹)·정계(淨界)·묘토(妙土)·불찰(佛刹)·불국(佛國)이라고도 한다. 넓은 의미에서는 부처의 세계를 말한다. 중생들의 세계는 번뇌와 더러움에 가득한 예토(濊土)인 데 반하여 부처의 세계는 깨끗하고 번뇌로부터 떠나 있기 때문에 정토라 한다. 정토에 대하여는 실재로 이 세계를 떠난 곳에 부처의 세계가 따로 존재한다고 보는 견해와 마음의 청정함이 곧 정토라는 견해가 있다. 아미타불(阿彌陀佛)의 극락(極樂) 세계는 대표적인 정토인데, 이를 묘락(妙樂)·안락(安樂)·안양(安養)이라고도 한다. 법장비구(法藏比丘)가 48서원(四十八誓願)을 세우고 수행하여 이룩한 이 극락세계는 이 세계로부터 서방(西方)으로 십만억불국토(十萬億佛國土)를 지난 곳에 실재하고 있다고 본다. 참된 마음으로 아미타불을 믿고 염불하면 죽고 난 뒤 그곳에 태어날 수 있다고 한다. 그곳은 아무런 번뇌나 괴로움, 더러움이 없고 온갖 보배와 청정한 것들로 가득 차 있으며 항상 부처의 설법을 들을 수 있다고 한다.

 

14. 욱면비 염불 서승(郁面婢 念佛 西昇) 경덕왕(景德王) 때 강주(康州; 지금의 진주晉州, 또는 강주康州라고도 하는데, 그렇다면 지금의 순안順安이다)의 남자 신도 수십 명이 뜻을 서방(西方)에 구해서 고을의 경계에 미타사(彌陀寺)를 세우고 만일을 기약하여 계(契)를 만들었다. 이때 아간(阿干) 귀진(貴珍)의 집에 계집종 하나가 있었는데 이름을 욱면(郁面)이라 했다. 그 주인을 따라 절에 가서 마당에 서서 중을 따라 염불(念佛)했다. 그 주인은 그녀가 그 직분에 맞지 않는 짓을 하는 것을 미워하여 매양 곡식 두 섬을 주어 하룻밤 동안에 다 찧으라 했더니, 계집종은 초저녁에 다 찧어 놓고 절에 가서 염불하여(속담에 말하기를, "내 일이 바빠서 주인 집 방아 바삐 찧는다" 한 것은 대개 여기에서 나온 말인 듯싶다) 밤낮으로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녀는 뜰 좌우에 길다란 말뚝을 세워 두 손바닥을 뚫어 노끈으로 꿰어 말뚝 위에 메고는 합장(合掌) 하면서 좌우로 흔들어 자기를 격려했다. 그 때 하늘에서 부르는데, "욱면랑(郁面娘)은 당(堂)에 들어가 염불하라" 하였다. 절의 중들이 듣고 계집종을 권해서 당에 들어가 전처럼 정진(精進)하게 했다. 얼마 안 되어 하늘의 음악소리가 서쪽에서 들려 오더니 욱면은 몸을 솟구쳐 집 대들보를 뚫고 올라가 서쪽으로 교외(郊外)에 가더니 해골(骸骨)을 버리고 부처의 몸으로 변하여 연화대(蓮化臺)에 앉으서 큰 광명을 발사하면서 서서히 가버리니, 음악소리는 한참 동안 하늘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 당(堂)에는 지금도 구멍이 뚫어진 곳이 있다고 한다(이상은 향전鄕傳에 있는 말이다).

15. 의상 [義湘]

      625(진평왕 47)∼702(성덕왕 1). 신라시대의 승려. 우리 나라 화엄종(華嚴宗)의 개조(開祖)이다

      671년(문무왕 11) 낙산사 창건, 676년(문무왕 16) 부석사(浮石寺)창건

      의상 이전부터 이미 우리 나라에 화엄사상이 전개되어 있었지만, 화엄사상이 크게 유포되기 시작한 것은 의상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의상이 화엄대교를 전하기 위하여 건립한 사찰은 부석사를 비롯하여 중악 팔공산 미리사(美里寺), 남악 지리산 화엄사(華嚴寺), 강주 가야산 해인사(海印寺), 웅주 가야현 보원사(普願寺), 계룡산 갑사(甲寺), 삭주 화산사(華山寺), 금정산 범어사(梵魚寺), 비슬산 옥천사(玉泉寺), 전주 모악산 국신사(國神寺) 등 화엄십찰(華嚴十刹)이다.

       이 밖에도 불영사(佛影寺삼막사(三幕寺)·초암사(草庵寺)·홍련암(紅蓮庵) 등을 창건한 것으로 전하여 온다. 이 모든 사찰들이 모두 의상에 의하여 창건되었다고 믿기에는 문제가 있으나, 의상과 그의 제자들에 의하여 건립되었음은 틀림없다.

       의상의 교화활동 중 가장 큰 업적은 많은 제자들의 양성이었다.

 

16. 낙산사  [洛山寺]

      

신라의 고승 의상이 중국에서 수도를 한 후 신라의 불교를 융성케 하기 위해 전국을 돌며 불사를 짓던 중 이곳에 들러 바닷가의 굴속에서 관음보살을 보기위해 기도를 하다가,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바다에 투신하려 하였는데, 이때 바닷가 굴속에서 희미하게 관음보살이 나타나 여의주와 수정염주를 건네주면서,“나의 전신은 볼 수 없으나 산 위로 수백 걸음 올라가면 두 그루의 대나무가 있을 터이니 그곳으로 가보라”는 말만을 남기고 사라졌다고 한다. 그곳이 바로 지금의 원통보전의 자리이다. 원통보전 내부에는 관음상이 보관되어 있는데, 이 관음상은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량을 복구하고 이곳으로부터 약 8 km 떨어진 설악산 관모봉 영혈사에서 옮겨 왔다는 관세음보살상이다. 제작 시기는 12세기 초로 추측되는데, 고려시대 문화의 극성기 양식을 나타낸 매우 아름다운 관음상이다. 낙산사에는 조선 세조 때 세운 7층석탑을 비롯하여 원통보전과 홍예문(虹霓門) 등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고, 사찰을 감싸고 있는 돌담이 아주 아름답다.
사찰의 입구에 있는 홍예문은 화강암으로 아취형으로 쌓은 다음 석축 위에 팔작기와 지붕을 한 누각을 세워 놓은 조선시대의 石門으로 강원유형문화재 제33호이다. 또한 홍예문을 들어가면 낙산사의 법당을 이르기 전에 넓은 장원이 펼쳐지는데 주위는 잔디를 심어 보기가 좋다. 길 오른쪽에는 오래된 배나무 한그루가 굵은 줄기를 드러내고 작은 탑과 함께 서 있는데, 이는 양양 배의 효시가 되는 배나무라 한다.
운통보전앞에는 7층석탑하나가 서 있은데 조선시대의 석탑으로 보물 제499호이다. 전체높이 6.2 m, 상륜부 높이 1.41 m이며 탑은 화강석으로 만들었고, 상륜은 청동제이다.1466년(세조 12)에 중수하면서 3층에서 7층으로 늘렸고, 낙산사의 보물인 두 보주를 비장하였다는 석탑이다. 고려 말기에 전래된 라마계 탑의 영향을 볼 수 있는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석탑으로 평가되고 있는 귀한 자료다.

낙산사에서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의상대와 홍련암 위에 있는 해수 관음상이라 할 수 있다. 962년에 세워진 이 해수관음상은 화강암 관음상으로 높이가 무려 6m이르고 이곳에서 동해의 푸른 바다를 조망하기에 좋아 항상 많은 이들이 찾는 곳이다. 해수관음상에서 아래로 내려가면 의상대가 해안절벽위에 그림처럼 서 있고, 왼쪽길로 좀더 내려가면 우리나라 3대 관음기도처라는 홍련암이 절벽에 고아한 자태로 서 있다.

 

 

17. 부석사(浮石寺)

     경상북도() 영풍군() 부석면()에 있는 절. 신라() 30대 문무왕() 16(676)년에 의상()이 창건(). 석단(). 당간지주(竿). 석등. 삼층 석탑() 등()의 신라() 유물을 비롯하여, 고려() 때 건축()으로, 가장 오래 된 목조() 건물()인 무량수전(殿)과 조사당() 등()의 문화() 유산이 있음

부석사무량수전( 殿): 부석사()의 본전(殿). 정면 5간, 측면 3간의 팔작()집으로 내부()에는 서쪽 가로 불단을 두고 그 위에 장륙()의 석가() 여래상을 안치(). 봉정사의 극락전(殿)과 함께 가장 오래 되고 가장 우수()한 목조() 건축물()임. 건립() 연대()는 자세하지 않음. 국보() 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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