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서울관문사(금불대)

5월 26일 박영제 교수님 강의

ih2oo 2009. 5. 27. 09:59

2009년 5월 26일 화요일

서울금강불교대학 불교학과 2학년 한국불교사 박영제 교수님 강의

 

1. 고려말 척불론

    정도전; 삼봉 정도전은 태조 이성계를 도와 고려를 폐망시키고 조선을 개국하는데 크게 일조한 개국공신이다.

               이외에도 정도전이 유명한 이유로는 불씨잡변」 등의 저술로

               고려시대 국시를 이루었던 불교사상을 성리학으로 바뀌게 한 장본인 이기도하다.

               그의 성리학적 통치이념은 결국 조선시대 내내 스님이 도성 출입을 할 수 없을 만큼의 억불정책으로 이어진다.

   

    정도전(1337~1398)
             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종지(宗之). 호는 삼봉(三峰).
             친원배명(親元排明)정책 반대, 척불숭유
             전제개혁론을 주장, 단행(과전법)
             공양왕(恭讓王) 옹립
             조선개국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편찬
             제 1차 왕자의난 때 이방원(李芳遠)에게 참수되었다.
             삼봉집(三峰集), 경제육전(經濟六典), 불씨잡변(佛氏雜辨) 등
             http://reportg.egloos.com/209144

 

    불씨잡변佛氏雜辨)

          고려 말 및 조선 초에 정도전의 대표적인 배불에 대한 논설

        《불씨잡변(佛氏雜辨)》의 논설조목은 불씨윤회지변을 비롯하여 도합 20편이다.

          정도전은 불씨잡변을 저술하여 억불론을 주장했고 조선 건국 세력이 태조에게 주청하여 대대적인 불교 탄압을 전개하였다.

         고려 왕조에서 사찰 및 승려에게 주어진 혜택이 모두 철폐되었고, 사찰도 정리되었으며

       남은 사찰은 모두 산으로 쫓겨 들어갔다. 그러나 왕실은 개인적으로 불교를 계속 믿었고, 일반 민중들도 불교를 계속 믿었다.

 

2. 조선국가의 억불정책

     1) 종단의 통폐합과 승려의 환속

    

     태조-불교계의 폐단 제거, 승려들에 대한 지나친 특권 제한

     태종 5년-국가에서 정한 사원에만 토지와 노비 지급-11개종단 242여곳 사찰만 남아

     태종7년-7개종단으로 줄어(조계종, 천태종, 화엄종, 자은종, 중신종, 총남종, 시흥종)

     세종6년-7개종단이 선.교 양종으로 18사찰씩 36개 사찰만 존속, 승록사 폐지

     성종2년-도성안의 염불소 없애, 간경도감 폐지

     성종 23년-도첩 발굴 폐지

 

    승록사(僧錄司)

    승록사란 불교의 제반 사무를 맡아보기 위해 중앙에 둔 관청이다. 신라시대에도 있었던 듯하나 자세하게 전하는 것이 없다.

       고려에 와서는 초기부터 관련의 기록이 보이고 있다.

       양가(兩街)라든가 좌가승록(左街僧錄)·우가승록(右街僧錄) 또는 좌우양가도승록(左右兩街都僧錄)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모두 승록사 또는 그 일부의 직제를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상세한 내용을 전하는 기록이 없으므로 기능과 역할, 구성조직 같은 것을 알기는 힘들다. 다만

       표면상의 기록과 명칭에 의하면 승록사에는 좌우 양가(兩街)가 있어서 그 양가에 각각의 승록이 있었다.

       승록은 그 가(街)의 승려와 교단의 제반사를 관리하고 모든 불교행사를 주관하였던 것 같다.

       양가의 승록 위에 도승록(都僧錄)이 있어 전(全)승록사를 대표하고 양가를 총괄하여 관장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http://ask.nate.com/qna/view.html?n=8941397&ht=p

 

    도첩(度牒)

          도첩이란 민간인이 출가하여 승려가 될 때 이를 관청에서 공인해주는 문서를 말한다.

          아무나 승려가 되는 것을 막고 승려의 숫자를 제한하기 위해 실시하였다. 조선시대에 불교를 억압하기 위해 도첩제를 강화하였다.

 

     한국의 도첩제

          한국에서는 고려부터 시행되었으며, 조선 태조 때 더욱 강화되었다.

          승려가 되려고 하는 사람에게 국가에 대한 의무를 지게 한 후 도첩을 주는 방식으로 억불정책의 하나였으며

          승려가 되는 것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었다. 승려가 죽거나, 환속을 하면 도첩을 반환하도록 하였다.

          태조대에는 도첩을 발급하는 댓가로 막대한 액수의 포목을 도첩전으로 받았다고.

 

     2) 사림의 집권과 폐불정책의 단행

         성종의 뒤를 이은 연산군은 사원의 토지를 몰수하고 승려들을 환속시켰으며 선종과 교종의 도회소를 폐지시켰다.

        

         도회소(都會所)

                조선 초기에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을 관장했던 불교의 총본산.

                1424년(세종 6) 기존의 7개 불교 종파 가운데

                조계종(曹溪宗)·천태종(天台宗)·총남종(摠南宗)을 합하여 선종으로 하고,

                화엄종(華嚴宗)·자은종(慈恩宗)·중신종(中神宗)·시흥종(始興宗)을 합하여 교종으로 만든 뒤,

                이들에 소속된 전답과 승려를 관리하기 위하여 선종도회소와 교종도회소를 지정했다.

                각각의 도회소에서는 양종의 모든 종무(宗務)를 집행했으며, 승과(僧科)를 시행하여 승려를 새로 선발하는 기능도 수행했다.

              

                선종을 총괄했던 선종도회소(禪宗都會所)는 서울의 정릉 동쪽에 있는 흥천사(興天寺)에 있었으며,

                교종을 총괄했던 교종도회소(敎宗都會所)는 서울의 동대문 밖에 있던 흥덕사(興德寺)에 있었다.

               처음 세워질 당시 선종도회소는 18개 사찰과 4,250결의 전답, 1,970명의 승려들을 관장했으며,

                                       교종도회소는 18개 사찰과 3,790결의 전답, 1,800명의 승려들을 관장했다.

                이후 연산군(燕山君)이 도회소의 노비와 토지를 몰수하자,

                광주(廣州)의 청계사(淸溪寺)로 양 도회소를 옮겨 명맥만을 유지했다.             

                그러다가 중종(中宗)의 즉위와 더불어 승과제도가 폐지되면서 도회소라는 명칭도 사라지게 되었으며,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섭정을 하던 1550년(명종 5) 선교양종(禪敎兩宗)을 다시 부활시켰으나

                도회소 대신 본사(本寺)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05d0781a


           

           중종 반정으로 사림들이 정권을 장악한 이후에는 성리학에 입각한 완전한 폐불정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

            중종 11년-도승조 삭제

            <경국대전>은 사찰에 다녀온 부녀자들에게 곤장 100 대를 치도록 명시했다.

             국가 이데올로기는 불교에 대해 초법적인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경국대전> 도승조(度僧條)는 3 년에 한번씩 승과고시(僧科考試)를 통해 30 인의 승려를 선발하도록 규정했지만

             중종(中宗) 때부터 승과고시가 실시되지 않았다.

 

3. 조선 왕실의 불교 후원

     태조와 무학대사  

                      태조 이성계 는 장군시절 다쓰러저 가는 초가삼간  집에서 석가레 세개를 빼서 지고 나오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꿈이 하도 신기하여 꿈해몽겸 안부인사차 평소 잘알고 지내던 무학대사를 찿아갔다. 

                     상면하여 안부인사가 끝나고 차한잔으로 목을 축인다음 덕담을 논하던중  태조 이성계 왈

                       "오늘 대사님을 뵙고보니 돼지같이 보입니다" 라고하니 무학대사왈

                       "돼지같은 마음으로 보면 돼지갇이 보이고 부처같은 마음으로 보면 부처갇이 보이는 법이지요"

                    태조 이성계 는 고승다운 지혜에 감탄하여 꿈해몽을 부탁했고

                    다쓰러저 가는 초가 삼칸에서 석가레 세개을 빼서 나오는 꿈을 꾸얻으니 훗날 국왕이 될것을 예언했고 예언대로

                    이성계는 임금이 되어 무학대사를 왕사로 신봉 하였다는 이야기가와 일화가 있습니다..

                   http://cafe.daum.net/happyfam.com/FLE6/2?docid=1E7vR|FLE6|2|20090505125810&q=%C5%C2%C1%B6%BF%CD%20%B9%AB%C7%D0%B4%EB%BB%E7&srchid=CCB1E7vR|FLE6|2|20090505125810

 

     태종은 국가에서 행하는 각종 불사를 금지시켰지만 수륙재 등의 왕실 관련행사는 여전히 거행토록하였다.

     세종은 내불당을 창건

     세조는 조선시대의 호불군주로서 경전 필사, 경전 간행, 경전 번역, 원각사 창건 등 불사

     세조의 불교정책은 수미와 신미그리고 학조와 학열 등을 통해 추진되었다.

 

4. 조선 왕실의 불전 간행

    세종30년- 최초의 한글불전인 석보상절 간행

    월인천강지곡

    세조5년-월인석보 간행

    세조7년-간경도감설치-불전간행

    성종대 간경도감 혁파 후 금강경삼가해, 천수경, 오대진언, 육조단경 등이 훈민정음으로 번역 됨

 

5.  왜란과 호란 이후의 불교

      선교 양종의 재건과 의승군의 활동

      문정왕후의 후원으로 일시적 불교 재건

       (보우(普雨)를 신임해 1550년 선교(禪敎) 양종(兩宗)을 부활시키고, 승과와 도첩제(度牒制)를 다시 실시하는 등 불교 부흥을 꾀했다)

      명종5년 보우를 선종판사로 등용-양종을 재건, 승과와 도첩제 다시 실시

      조선 후기-서산 휴정, 사명 유정

 

  휴정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평양으로 피난하였다가 다시 의주로 피난하였다. 이 때 선조는 묘향산으로 사신을 보내어

       나라의 위급함을 알리고 휴정을 불렀다.

       노구를 무릅쓰고 달려온 휴정에게 선조는 나라를 구할 방법을 물었고, 휴정은

         “늙고 병들어 싸움에 나아가지 못할 승려는 절을 지키게 하면서 나라를 구할 수 있도록 부처에게 기원하도록 하고,

          나머지는 자신이 통솔하여 전쟁터로 나아가 나라를 구하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곧 전국에 격문을 돌려서 각처의 승려들이 구국에 앞장서도록 하였다. 이에

        제자 처영(處英)은 지리산에서 궐기하여 권율(權慄)의 휘하에서, 유정은 금강산에서 1,000여 명의 승군을 모아 평양으로 왔다.

       그는 문도 1,500명의 의승을 순안 법흥사(法興寺)에 집결시키고 스스로 의승군을 통솔하였으며,

        명나라 군사와 함께 평양을 탈환하였다.

 

    유정

         1544(중종 39)∼1610(광해군 2). 조선 중기의 승려. 승병장. 풍천 임씨(豊川任氏). 속명은 응규(應奎). 자는 이환(離幻),

         호는 사명당(四溟堂) 또는 송운(松雲), 별호는 종봉(鍾峯). 경상남도 밀양 출신. 수성(守成)의 아들이다.

 

     임진왜란시 의승군 활동

          조선시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봉기한 승병.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각지의 의병과 함께 승려도 전쟁에 참가하여

          왜군에 대항하였으나 초기에는 승병으로서의 조직적인 지휘계통은 없었다.

          그 뒤 조직적인 지휘계통을 가지고 왜군을 대적한 것은 묘향산의 승려 휴정(休靜)이 선조의 부름을 받고

          의주행재소(義州行在所)에서 알현한 뒤 전국 사찰에 기병하게 하면서부터였다.

 

   조선시대 억불이었지만, 대중 속에 숨쉬고 있었다.

 

 (둘이서 걸어 넘는 고갯길, 일방통행로 옆 길 바위는 자연 의자요 거기서 사과 한쪽과 쑥개떡 한 쪽 그리고 한 모금의 물 맛을 알 수 있는 곳이다)

 

 (산속 오솔길. 이길로 넘으면 암산말길. 질러 올 수 있을까 했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더라)

 

 (7층 설법보전 옆의 우면산 신록. 제법 파랗다)

 

 (설법보전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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