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서울관문사(금불대)

5월 12일 박영제 교수님

ih2oo 2009. 5. 14. 14:02

2009년 5월 12일 화요일

불교학과 2학년 

한국불교사 박영제 교수님 강의 내용 복습

 

1. 지눌과 정혜결사

정혜결사는 선정(禪定)과 지혜(智慧)를 근수(勤修)하는 결사(結社)이다.
정혜결사는

첫째 당시에 극히 속화되고 미신화된 '호국기복불교' '우상불교'에서 현실적으로 안심입명(安心立命)하고 구세제중(救世濟衆)하는 '정법불교'의 복귀운동이며,

둘째 명리(名利)의 도구화된 '형식불교, '가면불교'에서 진실한 출세간의 길을 밟아 성불도생(成佛度生)의 사명을 수행할 수 있는 '수행불교'의 재건운동이며,퇴폐하고 변질되어 버린 '궁중불교' '관권불교'에서 참신하고 생명 있는 '민간불교' '대중불교'의 건설운동이었다.


보조국사는 이러한 역사적 사명에서 구시대적 불교의 방향을 전환하려는 한편 참다운 '수행불교' '정법불교' '민간불교'를 실현하기 위하여 <근수정혜결사(勤修定慧結社)>를 발기했다.

이 세종류의 불교이념이 그 결사의 제호에 그대로 표현되었는데 '근수(勤修)'는 '수행불교'의 재건을 뜻하는 것이고, '정혜(定慧)'는 '정법불교'의 복귀를 말하는 것이며, '결사(結社)'는 지난날 궁정불교, 관권불교를 탈피한 새로운 민간자유의 수행집단을 구축하는 민간불교, 대중불교를 지향한 것이며, 이것이 정혜결사의 근본 취지이다.

 

이렇듯 지눌의 정혜결사는 오염되고 타락한 고려사회와 부패한 고려불교를 부정하고 올바르고 새로운 정법불교를 이루려는 신불교운동이었다. 또한 지눌의 삶 전체는 정혜결사의 뜻을 세우고, 정혜결사를 준비하고, 정혜결사를 실천하는 삶으로 요약될 수 있다.

 

 

2. 지눌의 감동적인 깨달음

  지눌은 일생 세  번의 깨달음을 경험하였다. 그는 이를 토대로  사상체계를 세워 나갔으며, 그  사상은 결사의 장에서 펼쳐졌다.  

첫 번째 깨달음은 전남 창평 청원사에서 <육조단경>,

두 번째는  예천 하가산 보문사에서<신화엄경론>을 읽고 이루었다. 두  번째의 경우는 선승이면서도 교종 계통의 논서를  보고 깨달은 것이 특이하다. 선종세서 문자를 소홀히 여기는 관행과는 대조적인 것이다. 그는 두 번째의 깨달음을  이룬 후 대중을 인도하려는 마음이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깨달음이 완성되면서 이타행의 종교적 실천도 익어갔던 것이다.
  

 지눌은 수선사 중창을  도반에게 맡기고서 이듬해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2년을 지내면서  열정적인 구도열릉 다시 한 번  보였다.

드디어 <대혜어록>을 보다가 활연대오하였다.  이 마지막 깨달음은 결사 운동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현실에  대한 선의 적극적인 면을 발견하고 현실사회와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로써  속세를 떠나 은둔하려는  결사가 속세로 되돌아오면서 속세에  물들지 않는 단계로  차원이 높아지게 되었다.  이제 그는 깨달음이 굳건하게 서고  현실과 결사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대중과 함께 결상에 매진하는 일만 남았다.
  

 지눌의 세 번에 걸친 깨달음은 그대로 대중을 이끄는 지도원리가 되었으며 저술로 구체화되었다.  현재 저술로는 <권수정혜결사문>. <진심직설>.  <수심결>. <원돈성불론>. <화엄론절요>.  <법집별행록절요사기>. <간화결의론>등이 전해 온다. 문자를  거부하는 일반 선승과 달리  여러 저술을 남기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이들 저술은 대단히 논리적이고 체계적이면서  다양한 중생의 능력을 고려하여 차근차근 친절하게 깨달음의 세계로 이끈다.  http://cafe.daum.net/wooriandongkim/FGdN/76?docid=TgI7|FGdN|76|20031207180018&q=%C1%F6%B4%AD%20%BC%BC%20%B9%F8%C0%C7%20%B1%FA%B4%DE%C0%BD&srchid=CCBTgI7|FGdN|76|20031207180018

 

 

3. 혜능스님의 법어집 육조단경

 원효.의상스님과 같은 시대를 살은 중국 혜능스님의 법어집인 『육조단경』에는 간명하면서 느낌을 깊게 주는 말씀이 있다. 바람에 깃발이 펄럭이는 걸 보고 논쟁이 벌어졌다. 바람이 움직이는 것인가? 깃발이 움직이는 것인가? 하는 논쟁이었다. 이 토론은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여기서 혜능스님은 말했다.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라고. 마음이 생기면 세상이 생기고 마음이 사라지면 세상도 사라진다. 세상의 모습은 나의 마음이 만든 것이다. 나의 마음이 바뀌면 세상은 바뀐다.

이점을 혜능스님의 법어에서는 전하고 있는 것이다.

 

4. 정혜쌍수(定慧雙修)

 선정·지혜를 함께 닦는 불교의 수행법. 선정과 지혜는 서로 따로 닦을 것이 아니라 병행되어 닦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정혜는 본디 계·정·혜의 3학으로서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인데, 후세에 선을 닦는 자가 선정에만 치우치고, 교를 공부하는 자는 혜학(慧學)에만 치우치는 폐단을 낳았다.

원래 교는 지식문과 이론문이고, 선은 실천문이다. 지식과 이론을 마음 닦는 방법에 대한 안내라고 보면, 선은 그것을 실천, 체험하는 방편이다. 고려의 보조국사(普照國師)는 선교상자(禪敎相資)의 정혜쌍수를 그 지도이념으로 하여 그릇된 폐단을 없애 올바른 깨달음을 얻도록 하였으며, 이것을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이라 표현하였다. 이 정혜쌍수는 보조국사 이후 우리 나라 선종의 중요한 수행법이 되었다.

 

5. 돈오돈수(頓悟頓修)와 돈오점수(頓悟漸修)란 무슨 말인가

돈오돈수(頓悟頓修)는 단 한번에 불심의 이치를 알아 구극의 깨달음에 도달하여 더 이상의 수행이 필요없는 경지를 말합니다.
반면에 돈오점수(頓悟漸修)는 깨닫고 나서도 계속 수행하여 깨달음의 세계를 이루는 것을 말합니다
. 본래 돈오의 성불론은 선종
에서 주장되었습니다. 즉 미망과 깨달음은 한 생각의 차이이니 본성이 단지 일념에 상응하여 중생의 자아가 바로 본심을 보면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이 돈오의 성불론입니다. 그런데 돈오점수란 그렇게 한 순간에 깨달았다 할지라도 완전한 깨달음이란 순식
간에 되는 것이 아니라 불도를 차례대로 닦고 행하여 점차적으로 향상하여 완성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특히 완전한 깨달음인
돈오돈수와 깨닫고 나서도 계속 깨달음을 닦아야 하는 돈오점수의 차이는 선종의 수행론에 대한 이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우리
나라도 선종의 영향이 지대하여 돈오돈수, 돈오점수라는 말을 자주 쓰나 모두 깨달음을 취하는 방법에서 나온 용어입니다. 그 자
리에서 바로 깨닫느냐와 점차로 깨닫느냐의 문제는 돈오 속에서도 점수가 있을 수 있고 점수 속에도 돈오의 깨달음이 있다고 보
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완전히 깨닫는다고 할지라도 깨달은 성인은 그전의 수행과 깨달음을 계속 실천하므로 돈오 속에는 점오
의 과정이 있게 됩니다. 돈오점수도 마찬가지입니다. 깨닫고 나서 계속 점차적으로 수행하여 단계를 밟는다 해도 그 속에는 깨
달음의 찰라찰라의 연속이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불자들은 돈오돈수나 돈오점수의 차별적 구별보다는 돈오 속에 점
오, 점오 속에 돈오라 생각하고 열심히 수행하는 것이 옳은 방법이라 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이루신 정각도 이후의 모든 중생제
도도 돈오돈수니 돈오점수니 하기 어려운 돈오와 점오의 일치이기 때문입니다.
http://cafe.naver.com/kkgbb.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595

 

 

 

 (제법 푸르러진 관문사 뒷산의 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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