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5월 19일 화요일
서울금강불교대학 2학년 공부 내용를 복습함
1. 십악업과 십선업
인간은 행복하기를 바라면서도 불행을 불러올 악업을 일삼는 어리석은 짓을 되풀이하고 있다.
부처님은 이렇게 악업을 열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몸으로 세 가지 억업 때문에 괴로운 보를 받는다. 살생과 도덕질과 사음이 그것이다.
입으로 짓는 네 가지 악업 때문에 괴로움을 받는다. 그것은 거짓말, 이간질하는 말, 욕설, 아첨하는 말이다.
뜻으로 짓는 세 가지 악업 때문에 괴로움을 받는다. 곧 욕심, 성냄, 어리석음이다.
이상의 열 가지 악업에 반대되는 것이 십선업이다.
즉
1. 살생하지 않는 것.
2. 훔치지 않는 것.
3. 간음하지 않는 것.
4. 거짓말 하지 않는 것.
5. 두말하지 않는 것.
6. 악한 말을 하지 않는 것.
7. 간사한 말을 하지 않는 것.
8. 남의 것을 탐내지 않는 것.
9. 성내지 않는 것.
10. 바른 견해가 그것이다.
이 열 가지 업 가운데 어느 하나도 인간의 사회생활과 무관한 것은 없다.
작은 구멍 하나 때문에 거대한 댐이 무너지듯이, 사회라는 큰 틀도 개인의 변화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특히 문명의 이기와 개인주의가 범람하는 이 세대에 개인의 가치관과 삶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개인의 변화는 시대정신을 이끄는 출발점이자 완성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부처님께서 불자 개개인 들이 지켜야 할 생활규범의 원칙으로 제시하신 것이 바로 이 열 가지다.
이 열 가지 원칙들은 몸과 입과 생각에서 비롯된 것으로,
몸과 관련된 것이 세 가지,
입과 관련된 것은 네 가지 ,
생각과 관련되 것이 세 가지다.
첫째, 몸과 관련된 규칙으로는,
산 목숨을 죽이지 말고 살려주는 것
남의 것을 훔치지 말고 남에게 베풀 것,
다른 사람과 삿된 관계를 갖지 말고 정숙한 생활을 할 것을 강조하셨다.
이 세 가지를 지키지 않을 경우 자신에게도 해로울 뿐 아니라 다른 이를 고통에 빠뜨리는 원인이 된다.
둘째, 말과 관련된 규칙이다.
사소한 말 한마디가 상대방 가슴에 비수를 꽂는 경우가 있다. 언어 생활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다.
먼저, 남에게 정직한 말을 해야 한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자신의 조그마한 이익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거짓말은 자신감을 상실한 사람이나 숨길 것 이 있는 사람들이 하는 짓이다.
스스로 당당한 사람이 되어 거짓말에 쏟는 노력을 긍정적인 분야로 돌려 정직하게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부드러운 말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안온한 상태에서 서로 흉금을 터놓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남을 속이는 것은 나를 속이는 일이다. 이런 행동이 계속되면 나중에는 습관적으로 남을 속이게 된다.
인간의 자의식은 언제나 잠재하고 있으므로 속이다 보면 나중에는 누가 나를 속이는 것은 아닌지 남을 의심하게 된다.
그리고 깊어지면 좋지 않은 심리적 변화를 일으키기도 한다. 따라서 바른 말로 신뢰를 쌓아야 하며,
이상한 말로 남을 현혹시키지 말아야 한다.
우리 속담에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남이 잘 되는 것을 못 봐주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런 마음 상태가 지속될 경우, 믿음보다는 불신이 깊어져 사회가 혼란스러워진다.
이간질은 비윤리적임을 알아야 하며 서로를 이해하고 화합으로 이끄는 말을 사용해야 한다.
셋째, 생각과 관련된 규칙들이다. 우리들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 속에서 살아 간다.
이것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계율, 선정, 지혜의 삼학을 닦아 나아가는 것뿐이다. 잘못된 행동의 뒷면에는 탐욕이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탐욕을 버리는 정신 수양이 필요하다. 부처님께서는 늘 무욕의 경지를 설하셨다.
재가불자들은 탐욕을 억제하고 지족하는 삶을 살아나가야 한다.
한편, 남을 배려하지 않고 화를 낼 경우 인간관계를 불편하게 만들고 돌이킬 수 없는 분열과 대립으로 몰고 간다.
따라서 자신의 조급한 마음과 남을 배려하지 않고 화내는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 중요하며, 그것은 수행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성냄이 없는 경지를 부진에라고 한다. http://blog.daum.net/01193704043/12410082
2. 칠불통계게(七佛通戒偈)
중국의 백낙천과 조과 도림선사의 문답으로 유명한 게송이 칠불통계게(七佛通戒偈)입니다.
‘모든 악은 짓지 말고 모든 선은 받들어 행하라. 스스로 그 뜻을 맑게 하면 이것이 곧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제악막작 중선봉행 자정기의 시제불교 (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 라는 내용입니다.
과거의 부처님을 포함한 모든 부처님의 공통된 가르침으로 제시된, 쉽지만 깊은 지혜가 담겨 있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칠불은
석가모니부처님 이전에 계셨던 여섯 분의 부처님(비바시불, 시기불, 비사부불, 구류손불, 구나함모니불, 가섭불)과
석가모니부처님을 포함한 일곱 분의 과거 부처님들을 지칭합니다.
그런데 칠불이외에도 경전에 의하면 석가모니부처님에게 수기(授記)를 하신 연등부처님을 비롯하여
24분의 과거불이나 53분의 과거불에 대해 말하기도 합니다.
또 서방정토에 계신다는 아미타부처님,
미래세에 출현하실 미륵부처님도 있습니다.
그 중 유명한 것이 칠불통계로 알려진 일곱 분의 부처님인 것이지요.
http://ask.nate.com/qna/view.html?n=8607072&ht=p
3. 제법실상(諸法實相)
법화경을 제법실상(諸法實相) 개성불도(皆成佛道)라 함은 법화경을 수행하여 제법실상을 깨달으면 모두 불도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제법(諸法)이라 함은 세상에 있다는 온갖 모든 것을 두고 하는 말씀이며
실상(實相)이란 본래 성품의 진실한 모양을 두고 하는 말씀이다.
실상이란 모든 것의 본래 근본성품이니, 곧 법신불(法身佛)의 자리다.
법화경은 제법실상의 도리를 잘 드러내고 있다. 이십 팔품 품마다 제법실상의 도리를 담고 있으나
그 중에서도 방편품은 이를 극명(克明)하게 드러내고 있다.
제법실상의 진리를 깨달음으로써 법화경의 진리를 깨닫는 것이요 다른 둘 셋은 아니다.
석가세존께서는 이 법은 깨닫기 어려워 오직 부처님과 부처님만이 깨달아 다한 법이라 하셨다. 이 말씀은
제법실상을 깨달음으로써 불도에 들게 됨을 뜻하고 있다. http://blog.daum.net/mjpark39/16889757
4. 삼제원융(三諦圓融)
삼제원융(三諦圓融)이란 일심삼관(一心三觀)사상을 말한다.
천태(天台)의 진리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서 천태 법화사상(法華思想)을 체계 짓는 근저(根底)가 되고 있다.
천태학에서 일념삼천(一念三千)이 세계관이라면 삼제원융(三諦圓融)은 수행법이다.
또한 천태종의 교리를 조직하는 근본적 사상적 기반은 중도실상(中道實相)이라 할 수 있다.
이 중도실상(中道實相)이 곧 공(空), 가(假), 중(中) 삼제가 원융한 것을 의미 하는데,
공제란 모든 존재하는 것은 공(空)이라 하고, 관(觀)하는 것을 공제(空諦)라고 한다.
공제의 입장은 모든 것의 존재를 부정(否定)하고 그 부정에서 모든 것을 동일(同一)한 것으로 본다. 허무(虛無)이다.
반야(般若)의 가르침을 허무적이라고 본다.
대승불교(大乘佛敎)의 사상적 기초에는 이 공(空)이 밑받침 하고 있다.
가제(假諦)란 공제에 의해 일단 부정(否定)되어 존재하는 것을 다시 가(假)라고 하여 긍정(肯定) 하는 것이다.
여기서 일단 부정되어 존재하는 것을 한층 고차(高次)의 입장에서 긍정하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모두 공(空)인지 모르지만 이 공(空)의 것을 긍정(肯定)하는 것이다. 가(假)의 존재를 받아 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가제에 집착할 때 다시 현실(現實)의 전면적인 긍정(肯定)이 생겨난다. 그래서 가제에 머무르는 위험을 경계하는 것이다.
그것이 가제(假諦)와 공제(空諦)를 상호부정(相互否定)하게 되는데, 이를 중제(中諦)라고 한다.
가제(假諦)에 의해 공제(空諦)를 부정(否定)한 것 처럼 공제(空諦)에 의해 가제(假諦)를 부정(否定)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중제(中諦)는 공제(空諦)와 가제(假諦)를 아주 떠나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편으로 모든 존재하는 것을 공(空)이라 부정(否定)하고
또 한편으로는 모든 존재(存在)하는 것을 가(假)라고 부정(否定)하는 이 두개의 입장인 부정(否定)과 긍정(肯定) 가운데
중제(中諦)가 자리 잡고 있다고 보겠다.
다시 말하면 공제(空諦) 가운데 가제와 중제를 포함하고, 가제(假諦) 가운데 공제와 중제를 포함하고,
중제(中諦) 가운데 공제와 가제를 포함하고 있는, 세 가지의 존재의 자각이 혼연하여 일체(一體)가 된 곳에
삼제원융(三諦圓融)의 경지(境地)가 전개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인생(人生)의 궁극적 깨달음의 경지(境地)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삼제(三諦)의 진리(眞理) 관(觀)하는 것이 삼관(三觀))이 되고,
일심삼관(一心三觀)이란 인간의 한마음이 그대로 원융삼제(圓融三諦)라고 관(觀)하는 것이다.
모든 존재(存在)가 있는 그대로 제법실상(諸法實相)의 진리라 보는 근거는 여기에 있는 것이며
천태사상(天台思想)의 가장 기본이 되는 실천의 요체이다. http://cafe.daum.net/ad48/SIeY/11?docid=1Ewvu|SIeY|11|20090407214919&q=%BB%EF%C1%A6%BF%F8%C0%B6&srchid=CCB1Ewvu|SIeY|11|20090407214919
5. 참회(懺悔)
1. 확실하게 인과(因果)법을 믿는 것.
2. 무거운 두려움을 가질 것.
3. 부끄러움과 뉘우침을 깊이 느낄 것.
4. 죄를 멸하는 방법을 구할 것.(이른바 대승경전 속에 여러 가지 행하는 방법을 밝혔으니 마땅히 법대로 수행해야 한다.)
5. 이미 지은 죄를 나타낼 것.
6. 연이어 죄지은 마음을 단절할 것.
7. 불법을 지킬 마음을 일으킬 것.
8. 큰 서원을 일으켜서 중생을 제도 해탈케 할 것.
9. 항상 시방의 부처님을 염할 것.
10. 죄의 본성(本性)이 공함을 관(觀)할 것.
열가지 법이 성취 되려면?
도량을 장엄(莊嚴)하고 목욕하여 청정(淸淨)하게 하고
정결(淨潔)한 옷을 입고 향(香)을 태우고,
꽃을 삼보의 앞에 공양하고 법대로 수행하기를 7일, 14일, 21일,49일등등 한마음으로 참회한다.
어떻게 중죄가 소멸되는 상을 알 수 있는가?
스스로 몸과 마음이 가볍고 좋아지는 것을 느끼며
좋고 상서로운 꿈을 꾸거나
여러 가지 신령(神靈)스럽고 상서러운 색다른 상을 보거나
착한 마음이 개발(開發)되는 것을 느끼거나
스스로 좌중(座中)에서 몸이 구름의 그림자처럼 느껴져 그로 인하여 여러 가지 선의 경지를 증득하게 된다.
(그윽한 관문사 풍경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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