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9월 4일 일요일
6·25 한국전쟁이 나고 우리는 금강을 건너고 산을 넘어 피난했다.
당시, 나이가 어린 나는 부모님을 따라 걷는 길이 어려운 기억은 없지만, 먼 길을 걸어 우리 동네보다 산골로 갔다는 사실과
얼굴이 쭈굴거리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지금도 그리 크지 않지만, 외가는 언덕 중턱에 아담하고 작은 초가집이었는데 그 외가의 헛간 같은 곳에서 살았던 기억이 난다.
딱지치기, 제기차기, 땅따먹기, 구슬치기, 징 돌이, 숨바꼭질, 말뚝박기 등 당시 같이 놀던 친구들과 헤어져 깊은 산골에서
혼자 있기는 너무나 심심했다.
같이 어울려 놀 친구가 없는 나는 심심풀이할 곳을 찾았는데 바로 그곳은 외가 마당 가 사람이 드나드는 문, 사립문이었다.
사립문의 모습을 그리면, 문짝에 엮인 재료가 싸리나무가 주였지만, 때로는 대나무를 비롯하여 여러 나뭇가지를 엮어 만들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굵은 나무로 네 군데 테를 만들고 중간 두 세 군데 가로 댄 나무 사이에 잔 가지를 엮어 묶어 만든 문 그것이 사립문 인데
나는 이 문에 매달려 흔들거리며 오가는 소위 ‘문짝 그네’를 타는 유일한 나 혼자만의 놀이를 발견한 것은 이곳 생활이 한참이나 지난 후였다.
그러나 이 놀이도 금방 끝이 났다. 문짝 타기 놀이하는 나를 외할아버지가 본 것이다.
“저놈! 문 부서져 이놈아!”
호통을 치시면서 작대기를 찾으시는 그때 외할아버지는 나는 너무나 무서웠다.
그 후로 외할아버지가 안 계실 때만 몰래 문짝 놀이는 계속됐지만, 또 한 번 들켜 혼난 후로는 문짝 놀이는 더 할 수 없었다.
그 추억의 문짝이 있던 외가 마당 가에 오늘 와 보니 그 옛날의 추억이 그립기도 하다.
바로 그 문짝 옆에 그 때도 있던 산수유나무(어릴 때는 이름도 몰랐던 나무)가 오늘은 고목으로 이런 모습이다.
나의 외가는 오곡동(五谷洞)이다.
▲고목이 된 산수유나무
오늘, 복룡이 부모님 산소 벌초를 하고 서울 동생 가는 공주역을 들러 오는 길에 반송리를 지나 이곳 옥곡동을 지나게 되어
갑자기 외가가 있는 마을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오곡동 나의 외가 마당 가에 서 있는 연륜이 오래된 산수유나무의 몸집
외가에 커다란, 그야말로 밑동이 아주 큰 산수유나무가 한 그루 마당 가에 서 있다.
나는 오늘, 이 연조 깊은 산수유나무를 보고 과거가 새롬새롬 떠올랐다.
사람 누구에게나 아름다운 추억만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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