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의 공원(산책로)/공산성(산성공원)

공산성 안내

ih2oo 2011. 8. 10. 20:44

공산성 안내 정확히

 

 

 

 

 

 

공산성(공주시청 멀티미디어공주-공주 공산성)

 

공산성은 백제의 수도가 웅진 즉, 지금의 공주에 있을 때, 공주를 지키던 백제의 산성입니다. 웅진은 문주왕, 삼근왕, 동성왕, 무령왕을 이어 성왕16년이던 538년에 부여로 천도할 때까지 64년간 백제의 수도였지요. 공산성은 금강변 야산의 계곡을 둘러싼 산성으로, 원래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으나 조선시대에 돌로 쌓은 석성으로 다시 만들어 졌어요. 이렇게 공산성은 백제 웅진시대를 대표하는 산성이자,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전사하는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일어날 꿈을 꾼 백제인의 의지를 그대로 느끼기에 충분한 유적지랍니다

 

안녕하세요, 나는 효돌이에요. 우리 함께 공산성에 대해 알아보도록 해요. 공산성은 공주에 위치한 백제시대의 산성으로 웅진성이라고 불렸습니다. 공산성은 해발 110미터 높이의 야산을 둘러쌓은 성으로, 동서의 길이가 약 800미터로 길고, 남북의 길이가 약 400미터로 더 짧은 타원형의 모양을 하고 있어요. 전체 둘레는 약 2,660미터입니다. 공산성은 포곡형 산성인데, 포곡형 산성이란 그 안에 골짜기가 포함되어 있는 산성을 뜻해요.

 

공산성은 시대에 따라 다양한 이름을 가지고 있어요. 처음 쌓여진 백제 때에는 웅진성이라고 불렸지요. 그런데 웅진성 말고도 또 다른 이름을 가지고도 있데요. 바로 고마성입니다. 중국의 역사서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어요. 이 때문에 고마성은 곧 웅진성을 말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 후 공산성은 고려시대에는 공산성으로 불렸고, 조선 인조 이후부터는 쌍수산성으로도 불렸답니다.

 

서기 475년 고구려의 장수왕이 3만의 군대를 이끌고 백제를 공격했어요. 당시 백제의 왕이었던 개로왕은 고구려의 첩자 도림의 말을 듣고 무리한 토목공사를 벌여 민심을 잃어버린 상태였어요. 이를 알아챈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한 거지. 결국 개로왕은 한성을 고구려에게 빼앗기고 아차산에서 죽임을 당합니다. 나라가 멸망할 위기에 처하자, 백제는 웅진으로 도읍지를 옮기게 됐어요. 왜 옮긴 곳이 웅진이었냐 하면, 웅진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지키기가 쉽고 공격하기가 어려우므로 고구려의 침입을 막기 쉽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지도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웅진 북쪽으로는 차령산맥과 금강이 둘러싸고 있고, 동쪽으로는 계룡산이 막고 있어서 고구려로 부터의 침략을 방어해주는 천혜의 요새지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괄의 난은 1624년 즉, 인조 2년 정월에 이괄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반란입니다. 이괄이 인조반정 때 공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2등 공신으로 임명되고 더구나 외지인 평안도로 부임하게 된 데 앙심을 품은 것입니다. 이괄의 군대가 한양 가까이 오자 인조임금과 대신들은 한양을 떠나 공주로 피신하였어요. 바로 공산성으로 피난을 온 것입니다. 이후 이괄의 난이 진압되자 인조는 크게 기뻐하며 한양으로 되돌아가게 되었어요. 당시 인조는 5박6일 동안 공산성에 머물러 있었는데. 쌍수정 사적비에는 그때의 인조의 행적이 잘 기록되어 있답니다.

 

쌍수정은 공산성의 진남루 서쪽에 위치한 정자로, 1624년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머물렀던 곳입니다. 이때의 일을 기념하기 위해서 1734년, 즉 영조 10년에 이 정자를 세웠어요.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이곳에 머물렀던 6일 간의 일을 기록한 쌍수정 사적비도 근처에 있단다.

 

인조임금이 이괄의 난을 피하여 공산성에 머물렀을 때, 두 그루의 나무 밑에서 반란의 진압 소식을 기다렸다고 합니다. 난이 진압되자 왕은 두 그루의 나무에 벼슬을 내렸습니다. 영조 때에 이수항이 관찰사로 부임하여 나무가 늙어 없어진 자리에 정자를 건립하였는데, 이 건물이 쌍수정입니다.

 

쌍수정사적비는 조선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하여 이곳 공산성에 머물렀던 일을 기록한 것입니다. 비문의 내용에는 이괄의 반란과 인조가 난을 피하여 공산성에 머물렀던 6일간의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조는 이괄의 난을 피해 공주로 피신을 오게 됩니다. 피난 도중 우성면 목천리 근방 임씨댁에서 푸짐한 음식을 인조에게 진상하였는데, 그 중에 콩고물에 묻힌 떡이 있었습니다. 떡을 맛있게 먹은 인조는 이 떡의 이름이 뭐냐고 물었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인조는 "그것 참 절미로다" 라며 떡의 맛을 칭찬했습니다. 그때부터 임씨 댁에서 진상한 절미라 "임절미"라 부르게 되었고, 임의 "ㅁ" 이 "ㄴ" 으로 바뀌면서, 인절미라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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