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5월 24일 14시 국립박물관 강당에서 있었던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윤대영 교수의 강의 제목 '인문학으로 보는 세계유산'의 세 번째 강의로 베트남 호이안에 대한 내용입니다.
오후 2시 시작인데 장*수 선생님 덕분에 일찍 도착했습니다. 진묘수가 기다리는 공주박물관 앞입니다.
▲국립공주박물관에
1. 아시아 역사 속의 베트남, 그리고 호이 안
1) 주요 연표
기원전 111, 한 무제, 남 비엣(南越) 정부-북속(北屬) 시기-응오 씨 왕조-딘 왕조-띠엔 레 왕조-리 왕조- 쩐 왕조를 거쳐 응우엔 왕족까지 나열되어 있음
BC 200년경 세워진 남베트 독립왕국은 중국에 2차 정복되었다가 물리치고 양분되었다가 1802년 통일되었다. 프랑스 식민지로, 프랑스 속령으로 지배를 받았다. 1945년 독립을 선언했으나 프랑스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치렀고 1954년 승리했다. 제네바 협정에 따라 베트남은 소련이 지원하는 북부와 미국이 지원하는 남부로 분할되었다. 그 후 남북의 베트남 전쟁 휴전 이후 1973년 미군이 철수했으나 1975년 북베트남의 공격으로 남베트남 정부는 붕괴되고 1976년 7월 2일 베트남사회주의 공화국으로 통합되었다. (다음 백과 참조)
2) 베트남의 남진(南進)과 영토의 확장
남띠엔(남진)은 11세기부터 18세기까지 베트남이 남쪽으로 영토를 확장한 일을 말한다. 현재 베트남은 인도차이나 반도 동쪽연안의 전역을 영토로 하고 있다. 11세기 이후 각 왕조는 모두 남쪽으로 영토를 확장시켰다. 베트남의 역대 남진 정책은 모두 700년에 걸쳐 진행되어 처음보다 3배나 확장되었다.
베트남의 동쪽을 동해로 부르고 중국에서는 남중국해라고 부른다는데 왜 그리 동안(東岸)으로만 긴 나라가 됐냐면 서쪽의 산악지역 보다 확장하기 쉬웠던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다.
3) 호이 안(會安)
https://cafe.daum.net/vlfflvlsgodnth/Urlr/2?q=%EB%B2%A0%ED%8A%B8%EB%82%A8+%EC%A7%80%EB%8F%84&re=1
호이 안 시는 베트남 중부 꽝 남 성의 도시이고, 다 낭 시로부터 30km 떨어졌고 투 본 강의 하구에 위치하는 오랜 항구 도시다. 인구는 약 12만 명(공주시 인구는 102,747명)이다. 음식으로는 까오러우, 따오퍼, 껌가호이안 등이 유명하다. 모두 나는 한 번도 안 먹어 본 생소한 이름이다. 쌀국수 이야기만 들었는데 그것도)
까우러우~돼지고기, 향채, 숙주, 허브 등이 첨가된 쌀국수
2. 호이 안의 전사(前史), 참파(Champa, 192~1832)
1) 해양국가
1306년 당시의 참파~북쪽의 베트남, 북서쪽의 라오스, 서쪽의 앙코르 왕국
참파인의 해상교역 전통
-고원 지대에서 생산되는 상아, 코뿔소 뿔, 침향, 보석 등은 주요 수출 품목
-(7~10세기) 향료 무역
2) 15세기 후반부터 쇠퇴
15세기 후반 베트남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16세기에 참파 활동무대가 남쪽으로 이동
북쪽에서 내려온 용우엔씨가 꽝남 정권 수립~이때부터 호이 안은 외항으로 발전
3. 중부 베트남의 교역도시 호이 안(會安)의 발전
1) 배경
-참파의 해상 무역 전통 계승, 교역의 시대에 호이 안 번영
호이 안은 당시 용우엔씨의 대외 무역항으로 서구나 중국, 일본 및 동남아 각지 상인이 모여듦
꾸라오 짬 섬 근처에서 난파선 발굴
16세기말 이후 포르투갈인, 네덜란드인, 중국인, 일본인이 내항하여 국제 무역항으로 번영함
2) 서구의 상인과 선교사
-1498년부터 바스코다 가마의 인도 항로 발견 이후 대거 아시아로 진출함, 1511년부터 포르투갈을 시작으로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가 차례로 동남아시아에 들어옴
3) 중국~명나라의 해금정책 해제로 1567년부터 중국의 남해 무역이 자유로워져서 베트남으로 오기 시작
4) 일본~16세기말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한 朱印船(주인선) 제도의 창설로 일본인 거리 형성
(주인선(朱印船)~붉은 글씨로 된 통상 허가증(주인장)을 발급받아 무역 허가를 받은 일본 배)
來遠橋(내원교-일본교)-폭 3m 길이 18m, 중국풍 지붕의 부교로 안에 절 있음, 1593년 일본인이 건설
주인선 무역이 왕성한 17세기 경에는 일본인 마을이 있었고 300명 이상 일본인 거주함
5) 한국
호이안은 우리나라와도 인연이 각별함
1687년 추자도에서 풍랑 맞은 배가 표류, 호이안에 체류 후 수개월 후 중국 상선으로 조선으로 귀국
관공사(關公寺)-관제묘(중국인 거리에 있는 관우 모신 곳)
그들이 느낀 호이안의 이미지-누에 5회 쌀 수확 3번, 주식 걱정 없음, 굶어 죽거나 얼어 죽을 염려 없음, 아름다운 단청 입힌 누각이 화려, 진기한 새와 이상한 동물 집집마다 길러, 기이한 꽃과 보화가 곳곳에.
6) 쇠퇴~1630년 도쿠가와막부가 쇄국령 반포로 일본과의 무역 중단으로 일본인들은 유럽 상인의 통역 겸 중개자로 전락. 17세기 후반 천계령 발표로 연해 주민들이 해안 접근 못함, 연해 주민 내륙으로 보내 방어 시설 건설 노역 시킴. 교역에 부정적인 영향 끼침
중국인 거리의 화교 회관~복건회관(1773년 건설 화교회관), 광동회관(1786년 창건 광동계 중국인 회관), 1770년대 떠이썬 운동으로 도시 파괴 후 재건하여 19세기까지 이름, 떠이썬 정권은 해외 무역 반대, 1802년 프랑스인들에게 다낭 항구에서 독점 무역권 허가, 국제 무역항으로서의 번영은 다낭 항으로 옮겨짐
4. 현재의 호이 안
15~19세기의 동남아 교역항 유산 중에서 가장 잘 보존된 곳으로 알려져 있음
1) 참파의 흔적
구시가와 꾸라우짬 섬은 2009년 유네스코의 생물권 보호구로 지정됨
2) 중국의 흔적
호이안 역사문화박물관(원래는 화교들이 관세음보살을 모시던 사원), 무역 도자 박물관, 중국인 거리를 중심으로 오랜 건축물이 남아 있고, 1999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
3) 일본의 흔적
호이안의 교외에는 1647년에 죽은 곡미차랑 병위란 이름이 새겨진 일본인 묘지(1930년 일본인이 복원)
4)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흔적
중앙시장, 판보이쩌우 거리의 식당, 살롱
▲국립공주박물관 인문학 강좌 3강 내용 중 하나
꼭 가보라는 강사님의 권유와 함께 보여준 사진임
▲국립공주박물관 인문학 강좌 3강 강의 후 베트남에 대한 보충 설명하는 수강생
베트남은 우리나라와는 많은 인연이 있는 나라이고, 관광지가 많은 걸로 들었는데 유독 이곳 호이안에 대하여 주제를 삼았는지 궁금하고 역사도 중요하지만, 아름다운 관광 자원의 사진과 곁들인 설명이었으면 더 솔깃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오늘의 박물관에서의 인문학 강의에 임한 여러 수강생들의 열정과 강의에 많은 준비와 성의를 보여준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국립공주박물관 인문학 강좌 3강 강의 끝나고 귀가
▲국립공주박물관 인문학 강좌 후 돌아오는 길 백제큰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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