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 15일 수요일
공주는 그 옆을 금강이 흐르는 도시다.
웅진 백제 시대의 왕성도 이 강이 있어서였을 것이다.
강이 있으면 다리가 있다.
공주 금강에는 금강교가 있다.
금강의 다리 때문에 강 남북을 쉽게 왕래할 수 있다.
금강 강변에는 마을들이 있다.
금강교에서 바라보면 서쪽으로 연미산이 보인다.
그 연미산은 동쪽으로 길게 이어져 있다.
그 산 밑 동네가 도토뱅이 마을이다.
도토뱅이는 쌍신동이다.
쌍신동은 금강 강가 마을이다.
쌍신동 마을회관은 마을회의 장소이며 경로당이기도 하며 청년회도 이용한다.
쌍신동은 통장을 비롯한 동민들이 모여 합심으로 동네 발전을 위해 노력한다.
쌍신동 앞들은 강가의 퇴적물이 쌓여서 아주 비옥한 토질이다.
쌍신동 마을 앞 들판에서는 싱싱한 채소와 맛 좋은 쌀이 생산된다.
쌍신동에서 나는 대파를 비롯한 각종 채소는 공주시와 주변의 도시에서 인기가 높다.
쌍신동 앞에는 큰 제방이 있다.
연미터널로 연결되는 둑길은 전부터 차츰 높여지고 넓혀져서 지금은 4차선 국도다.
쌍신 앞 32번 국도는 대전과 서해안을 연결하는 주요 교통로다.
나는 쌍신동에서 태어나서 자란 사람이다.
1950년대 6·25 전쟁 직후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공주 금강, 강가의 아이들」이란 제목의 글이 충남도민리포터 글로 승인되었는데 그 내용을 보완하는 것이다.
금강 건너기의 애환
금강물이 적당히 흐르면 나룻배 타고 학교에 다녔고
가물어서 물이 적으면 바짓가랑이 걷고 강물을 건넜고
강물이 얼면 얼음 위로 걸어 다녔고
장마로 강물이 범람하면 학교에 가지 못했던 금강교가 끊어졌던 시절이었다.
엄청난 장마의 무서움
비가 많이 오면 강물이 서서히 불어났고, 나중에는 둑 넘어 밭을 덮고, 강물은 둑방을 차올랐다.
상류에서 온갖 잡동사니를 쓸고 내려온 시뻘건 흙탕물이 온 강을 메우고 둑이 넘칠 것 같은 기세였다.
강둑이 터지면 둑안 들판의 모든 작물들을 쓸어갈 텐데 걱정하면서 그 큰물을 조마조마하면서 구경하던 때였다.
다행히 한 번도 둑은 터지지 않았지만, 마음 조리며 그걸 구경이라고 했던 큰물 구경이었다.
불이 무섭다지만, 물이 그렇게 무서운 줄은 아마 모를 사람이 많을 것이다.
큰물이 간 다음에는 둑방에 널려있는 나뭇가지며 풀뿌리 각종 물건들을 거두어 모아 잘 말려서 땠던 기억이다.
위에서 떠내려와 강 너머 밭과 강둑에 걸친 것들을 말리면 좋은 땔감이 되었다.
강가에 살면서 겪고 느끼고 생각했던 일들이 많은데 이루 다 쓰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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