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한미소/사람들

선생님

ih2oo 2008. 11. 29. 14:08

선생님, 고마우신 선생님!

 

나에게 고마운 분 중에 선생님을 빼놓을 수 없다. 나를 이 자리까지 오게끔 한 사람 중에

나를 가르쳐주신 선생님의 덕분이 아닐 수 없다.

나를 담임하셨던 초중고교의 선생님들, 그리고 가르쳐 주신 모든 분들, 지금 생각하면

모두 못 잊을 분들이시다.

 

중동국민학교 6년간의 담임 선생님들

 1학년; 趙丁順 선생님

 2학년; 申順澈 선생님

 3학년; 權赫胄 선생님

 4학년; 李達夏 선생님

 5학년; 申鉉澤 선생님

 6학년; 李達夏 선생님

 

공주사범병설중학교 3학년 담임이신 이충구 선생님

 

공주사범학교 3년 간의 담임선생님 

1학년; 이종철 선생님

2학년; 손재수 선생님

3학년; 김경환 선생님

 

나에게 좋은 인연을 맺게 해 주신 몇 분의 사연을 적어보고자 한다.

 

1. 신현택 선생님; 공주중동국민학교 5학년 때 담임선생님

   

     한자 공부와 붓글씨 공부를 철저히 시키신 선생님

   

    선생님 덕분에 한문을 이만큼이나마 알게 되었다고 장담한다.

    신현택 선생님은 국어 교과서의 한글과 한자가 명기된 단어에서 한글을 모두 지우게 하시고

    한문만을 읽게 하셨던 분이시다. 예를 들면 「학교(學校)」에서 앞의 한글 부분 「학교」 부분을 먹물로 지우게 하셨기 때문에

    한자를 잘 익히지 않으면 한문을 읽을 수 없으니까 한자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문을 잘 읽을 수 있게 해 주신 신현택 선생님 고맙습니다.

 

    또 한 가지는 붓글씨 쓰는 법을 처음으로 가르쳐 주신 분이시다.

    붓글씨 연습 시간에는 꼭 벼루와 먹, 붓, 연습 종이(신문지, 마분지 등)를 준비하도록 하셨는데

    매시간, 준비물을 반드시 검사하셨었다. 준비물이 갖춰지지 않은 사람은 다시 집에 가서 가져오도록

    철저하게 가르치셨다.

    나는 공주 시내에서 4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곳에서 학교에 다녔는데, 그게 문제가 아니라

    우리 집에는 옛날 벼루라서 얼마나 크고 무거운지 이걸 가져오려면 그 당시 무명천으로 된 책보에 싸면

    축 늘어지고, 무겁고 하여 가져오기가 싫었다. 꼭 그  때마다, 십 리 길을, 금강 나룻배를 타고

    우성면 쌍신리 까지 가야만 했다. 갔다 오면 학교는 다 파하고.

    그 당시가 얼마나 원망스러웠는지.

 

    그래도 그때 그런 시련을 겪었기에 붓글씨를 좀 배웠고 그 배운 것을 써먹었다.

    교직에 있으면서 가는 곳마다 그 학교 학생들의 졸업장, 표창장, 상장 등은 주로 내가 맡아서 썼다.

    그때는 귀찮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내 필적이 많이 퍼져 있다는 생각을 하면 가슴 뿌듯하다.

    신현택 선생님 고맙습니다.

                    

2. 이달하 선생님; 공주중동국민학교 4학년 때와 6학년 때의 담임 선생님

  

   책 읽어주시던 선생님, 그리고 표준말 사용에 자극을 주신 선생님

 

   선생님은 우리에게 좋은 책을 읽어 주시던 선생님이시다.

   책이 귀한 시절 그때, 기억을 더듬으면, 에이브라함 링컨의 전기로 기억되는데

   매일 종례 시간에 조금씩 이야기를 읽어 주시면 그때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다음 날 그 시간이 기다려지기까지 했었다.

   나도 선생님의 본을 받아서 학생들에게 책(처음부터 끝까지, 황금박쥐 등)을 읽어 준 기억이 난다.

   직접 책을 읽게 하는 것, 독서교육은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언제나 중요하다. 하지만

   책을 읽어주는 데에도 독서교육 차원에서 큰 의미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초등학교 6학년 이달하 선생님

   선생님의 지명을 받고 일어나서 발표할 때에

      「조금」을 「쬐끔」이라고 말했다고

   6학년이나 되는 놈이 쬐끔이 뭐냐며 표준말을 써야 한다면서 여러 애들 앞에서

   창피를 주신 그때 그 선생님이 얼마나 미웠는지.

   한 참이나 고개도 못 들고 내성적인 나는 다시는 발표를 안 한다고 마음먹었지만

   그러나 내 잘못을 인정하고 선생님의 가르치심을 받들어서 좋은말 표준말을 써야겠다는 생각으로

   오늘은 살아온 게 아닌가.

 

   선생님은 학생들을 가르치되, 마음에 상처를 줘서는 안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특히 내성적인 학생에게는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된다고 본다.

   더구나 창피를 주면은 그 학생은 자신을 잃을 수 있다.

   노래를 못한다고 창피를 줘서도 안 되고, 뭐든 못하는 것을 나무랄 게 아니라

   잘 못 하는 그 원인을 알아서 고쳐줘야 한다는 신념으로 교단에 서게 자극을 주신

   이달하 선생님 고맙습니다.

 

3. 손재수 선생님; 공주사범학교 1학년 때 담임 선생님

 

   현장학습을 해 주신 선생님, 자극을 주신 선생님

 

   그 당시 우리 학급에 토끼 사육장을 만들고 돌려가면서 사료를 주고 커 가는 모습을 관찰과 실습을 하도록 하신 분이다.

   토끼를 기르면서 그의 먹이는 무엇이며, 습성은 어떻고, 번식은 어떻게 하나를 알도록 하신 것 같다.

   사일남(50명 재적) 우리 반 친구들은 대부분 충남 전역에서 모여든 친구들이었고

   나와 몇 안 되는 친구가 공주에 거주하는 관계로

   방학 때는 거의 날마다 토끼 사육장 관리를 도맡다시피 했었다.

   그런 연유로 공주 귀산국민학교 재직 시에

   「사랑의 동산」이라는 토끼 사육장을 만들어서 우리 반 애들에게 관리하도록 한 적도 있다.

 

   「짐승을 사육하거나 식물을 재배한 적이 있는 사람은 모든 생명을 귀히 여긴다」는 교훈을 가르쳐 주신 분이다.

 

   현장학습이란

   그 당시 과학책에 나오는 단원의 특성을 살려서 실물 또는 현장에 직접 찾아가는 수업을 하신 분이다.

   「자전거」를 배울 때

    힘의 전달을 실제로 보여주면서, 타 보면서 가르쳐 주시고,

    산성동에 위치한 「대창철공소」라는 데에 직접 모이게 하여

    밀링머신이며 쇠를 깎고 다듬는 현장 실습을 통하여 지금부터 근 50년 전에 우리를 가르치신 분이시다.

    

    박술음 방송 녹음을 틀어주시고 영어공부를 강조하신 선생님,

    1960년도 지금부터 48년 전에「거침이 없이 뛰어나가자. 삼차원!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

    학급가를 만들어 부르게 하셨던 분

    손재수 선생님, 존경합니다.

 

4. 윤야중 선생님; 공주사범학교 때 국어를 가르치신 선생님

 

    알기 쉽게 실예를 잘 들으신 선생님

 

    나중에 교육학이나 교육실습을 하고, 시키고 하는 과정에서 터득한

    「교수 용어는 쉽게」를 직접 모범을 보여주신 선생님이시다.

    일상생활에서 일어난 것을 예화로 들려주시므로 해서 귀 기울이게 하시고

    다음 이야기를 기대하게 하신 선생님

    학생을 가르치되 쉽고 재미있게 가르치는 선생님, 그 누구인가?

 

    기말시험을 본 후의 이런 일이 있었다

    국어공부가 재미있었고 시험 준비도 거의 완벽한 상황에서 시험을 치렀고

    답안지를 돌려받아서 검토한 결과 채점 미스가 있어서 항의했다.

    왜 경건의 건 자, 虔 자가 틀렸느냐고 선생님께, 사실은 항의가 아니고 정정 요구를 했더니

    건 자를 구부림 없이 민자로 써서 틀렸다는 것이다. 정말로 한자에서 그런 면까지

    정확히 써야 한다는 걸 깨달은 순간이었다.

 

    그래서 그 이후로 경건이라는 한문은 정확히 쓸 수 있다.

  

5. 임승수 선생님; 귀산국민학교 재직시 동료 선배 선생님

 

   글짓기 지도와 웅변 지도에 남다른 열성과 지도력이 있으신 분

 

   선생님께서는 그 당시 소년동아일보에 작품을 많이 쓰신 분이시다.

   「선생님이 들려주는 옛날이야기」를 쓰시기에

   나도 투고를 해 보니 실리기를 몇 번 했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신문이나 잡지에 이것저것 투고하는 재미를 붙였다. 이는

   임승수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영향과 자극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공주신문에 내 이야기를 써 준 제자)

 

 (초등학교 6학년 때 나에게 자극을 주신 선생님 이야기를 썼다)

 

 (윤야중 선생님께서 주신 자극을 중도일보 1990년 6월 8일 자에 소개)

 

 (1969년 3월 15일 자 소년동아일보)

 

 (1969년 3월 24일 자 소년동아일보)

 

 (1969년 9월 23일 자 소년동아일보)

 

 (1970년 7월 31일 자 소년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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